『거록업요어(居業錄要語)』는 권말에 수록된 양정용(楊廷用)이 지은 「거업록발(居業錄跋)」(1519년)에 의하면, 1507년에 장길이 간행하여 영남지방에 주로 보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역적 한계성을 벗어나 호거인의 학문을 전국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1519년경 진백도(陳伯度)가 율수현(溧水縣)에 재직하고 있을 무렵 다시 판각하여 보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4권 1책의 목판본(木板本)이다. 호거인이 학문을 강의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작성한 『거업록』을 같은 고향의 학자 장길이 요약하였다. 권수제(卷首題)는 ‘거업록요어(居業錄要語)’, 판심제(版心題)는 ‘거업록(居業錄)’이다. 책의 앞부분에는 1507년 장길이 지은 서문 「거업록요어서(居業錄要語序)」‚ 양렴(楊廉)이 지은 「호경재거업록서(胡敬齋居業錄序)」와 양렴의 서문에 대해 장길이 지은 짧은 글이 수록되었다. 책의 끝부분에는 1519년 양정용이 지은 「거업록발(居業錄跋)」이 수록되어 있다.
호거인은 강서성(江西省) 여간(餘幹) 출신으로 자는 숙심(叔心), 호는 경재(敬齋)이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출생했지만, 성실하고 학문에 뜻을 두어 오여필(吳與弼)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했다. 학문에 성취를 이루자 주변에서 배우려는 제자들이 많이 찾아왔고, 백록서원(白鹿書院)과 동원서원(洞源書院)의 초청을 받아 강의했으며, 회왕(淮王)의 초청으로 『주역』을 강의해서 인정을 받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가 평생 학문을 강의하고 도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는 것처럼, 성리학의 구체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제1권에서는 음양(陰陽)이 서로 조화하여 만물을 형성한다는 태극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학문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독서를 통해 이치를 궁구할 때에도 항상 자신을 위한 공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등 공부를 위한 기본적인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 서술했다.
또한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은 공문(孔門)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철저해야 하는 것이며,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하며, 말하지도 말고, 행동해서는 더욱 안된다는 철저한 수양을 강조했다. 그리고 불교를 비롯한 유학 이외의 학문에 대해 이단으로 거부하는 분명한 뜻을 밝혔는데, 유학자가 하나의 도리를 얻어 지키는데 반해 도교와 불교에서는 하나의 정신을 얻어 지키는 차이가 있고, 유학자가 각자의 정기(正氣)를 배양하는 것과 달리 도교와 불교에서는 각자의 사기(私氣)를 배양하는 차이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북송의 황제 휘종(徽宗)이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가장 대표적인 예임을 거론하며 학문의 과정에서 외부의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점 역시 분명히 했다.
전체적으로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소옹(邵雍), 주희(朱熹)를 비롯한 송대 성리학자들의 언급과 일화 등을 인용할 뿐만 아니라 안회(顔回), 제갈공명(諸葛孔明) 등의 일화 역시 자주 인용하면서 호거인이 일상에서 함양하고 체험하면서 깨달은 짤막한 단상과 간단한 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선(薛瑄)과 함께 명나라 초기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는 호거인의 저술 『거업록』에 대한 요약본이라는 점에서 명나라 초기 주자학의 동향을 보여주는 문헌이다. 또한 ‘공맹의 진전(眞傳), 정주의 적파(嫡派)’ 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철저하게 성리학을 고수하고 이단을 배척했던 호거인의 학문이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문헌이라는 점에서도 사상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