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일(無逸)』은 별도의 서문과 발문이 없기 때문에 편찬자와 구체적인 편찬 경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기관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장서인(藏書印) ‘춘방장(春坊藏)’과 ‘시강원(侍講院)’이 찍혀 있고 종이의 재질이 우수한 것으로 보아 세자시강원에서 왕세자의 교육을 위해 제작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불분권(不分卷) 1책의 필사본(筆寫本)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과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소장본 모두 경문(經文)에 대한 언해(諺解)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본에는 각각의 문헌에 ‘춘방장(奎中 1453, 奎中 1454)’, ‘군옥도서지부(群玉圖書之府, 奎中 1454)’, ‘시강원(奎中 1455)’의 장서인이 찍혀 있고, 옌칭도서관 소장본에는 ‘관물헌(觀物軒)’ 등 여러 개의 장서인이 찍혀 있다.
『서경』은 요(堯)‧순(舜)을 비롯한 삼대(三代) 제왕들의 사적과 치적들을 전(典)‧모(謨)‧훈(訓)‧서(誓)‧명(命)‧고(誥) 등 6가지 문체로 기록한 문헌으로 중국 고대 성왕들의 구체적인 제도와 가르침을 제시한 경전으로 중시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유학의 수입과 함께 전해졌으며, 통일신라시대 국학(國學)의 정식 교과목이자 과거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무일’은 『서경』의 여러 편 중에서 ‘홍범(洪範)’과 함께 가장 많이 인용되었던 편으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동생 주공(周公)이 문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성왕(成王)에게 제시한 통치에 대한 조언을 수록한 것이다.
내용은 첫째, 백성들의 농사일이 어렵다는 점을 알고 조상의 공덕을 잊지 말 것, 둘째, 은(殷)나라의 중종(中宗), 고종(高宗), 조갑(祖甲) 등은 백성의 어려움을 잘 알아 나라가 오래 가고 수명도 길었으나 후대 왕은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즐거움만을 탐했기 때문에 단명하였고, 셋째 주나라 태왕(太王)과 왕계(王季), 문왕 등도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알고 부지런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얻었으니, 향락에 빠지지 말고 이를 계승하여 실천할 것, 넷째 백성들이 국왕에 대하여 비판할 경우 이를 억압하지 말고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할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주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설명하고 있지만, 『서경』의 다른 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천적이고 교훈적이기 때문에 역대의 모든 통치자가 중시해야 하는 덕목으로 간주되어 황실 혹은 왕실에 그림으로도 제작되어 비치되기도 했다. 특히 당나라 현종(玄宗)이 내전에 무일편을 그림으로 표현한 「무일도(無逸圖)」를 그려 두었다가 그림이 낡아 산수화로 바꾼 후 정치가 문란해졌다는 일화와 송나라 인종(仁宗) 때 학사 손석(孫奭)이 무일편을 그림으로 그려 황제에게 바쳤다는 일화 등은 무일편의 내용이 군주의 통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치의 치란(治亂)을 반영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일』은 신하가 군주에게 간언하는 형태를 띠었고, 군주가 체감하기 쉬운 사례들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건의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서경』 무일편이 갖는 정치적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으며, 무일편에 대한 조선시대 왕실의 지극한 관심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