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왕실에서 제작되는 양정도와 그에 수록된 역대 제왕의 고사도와 관련된 제왕학 교재이다. 편찬자인 초굉(焦竤, 1540∼1620)은 강녕(江寧) 출신으로 자는 약후(弱侯), 호는 담원(澹園)이다. 1589년 장원급제한 후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을 역임했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훗날 광종(光宗: 泰昌帝)이 된 황태자 주상락(朱常洛, 1582∼1620)을 지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초굉이 편찬한 것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문헌은 1749년(영조 25) 간행한 무신자본(戊申字本, 奎中 1823)과 무신자본을 저본으로 하여 후대에 옮겨 적은 필사본(奎中 2474)으로 구분된다.
2권 2책의 활자본으로, 활자본을 저본으로 하여 후대에 필사한 후사본도 존재한다. 앞부분에 숙종(肅宗)이 지은 어제(御製) 서문이 수록되었고, 마지막 부분에는 영조(英祖)가 지은 어제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주(周)나라 문왕(文王) 이래 성군과 성현, 명재상 및 충신과 관련하여 본받을 만한 60건의 일화와 삽화가 수록되었다. 상권(上卷)에는 문왕이 세자로 있을 당시 이른 새벽에 부왕의 침실 앞에 가서 간밤의 안부를 여쭙고 부왕이 음식을 들 때 옆에서 항상 음식이 먹기에 적당한지 살폈다는 이야기를 수록한 「침문시선(寢門視膳)」, 문왕이 여망(呂望)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묻자 여망이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임을 말한 「진대빈민(賑貸貧民)」, 주나라 무왕(武王)이 강태공(姜太公)으로부터 단서(丹書)를 통해 통치에 대해 경계를 받았던 고사에 대한 「단서수계(丹書受戒)」, 주나라 성왕(聖王)이 즉위하여 동생 숙우(叔虞)와 함께 소꿉놀이를 할 때 오동나무 잎을 따 제후가 지니는 홀(笏)인 규(圭)를 만들어 제후로 봉한다고 농담을 하자 주공(周公)이 이를 듣고 제왕은 농담을 삼가야 한다고 하며 실제로 숙우를 제후로 봉했던 일화에 대한 「동엽괘우(桐葉卦虞)」등 30가지의 항목이 수록되었다.
하권(下卷)에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어진 재상 위상(魏相)이 옛이야기를 들어 정치의 득실을 논한 「조진고사(條陳故事)」, 한나라 명제(明帝)의 여동생 관도공주(館陶公主)가 아들을 위해 낭관(郎官)을 구하자 명제가 허락하지 않으며 오히려 돈을 주었다는 일화인 「애석낭관(愛惜郞官)」, 한나라 순제(順帝)가 예를 갖추어 번영(樊英)을 초빙한 일화인 「예빙유현(禮聘遺賢)」, 범선(范宣)이 8살 때 후원에 있는 복숭아나무에 손가락을 다친 후 울고 있는데 사람들이 아파서 우냐고 묻자 그런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한 것 때문에 운다고 한 일화인 「상지자비(傷指自悲)」 등 30가지의 항목이 수록되었다. 권말에 수록된 영조의 어제 발문에 의하면 효(孝)가 백가지 행실의 근원인 동시에 요순의 도 역시 효제(孝悌)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양정도해』는 명나라 황태자의 교육을 위해 편찬되었으며, 이후 청나라 황실에서도 제왕학의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에는 1704년(숙종 30)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온 이언경(李彦經, 1653~1710)이 『양정도해』와 함께 세자시강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화를 선정하여 그림으로 모사해 진상했다. 이후 『양정도해』는 조선후기 왕실에서 강조한 『소학』의 효 관념과 결합되며 중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