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이선생사제자답문(延平李先生師弟子答問)』은 조선에서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는데, 1554년(명종 9) 이황(李滉)의 발문이 있는 초간본과 1666년(현종 7) 송준길(宋浚吉)의 발문이 있는 중간본이 있다.
목판본으로 권수제(卷首題)는 ‘연평이선생사제자답문’이고, 판심제(版心題)는 ‘연평답문(延平答問)’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초간본(想白古 181.134-Y64ym)에는 ‘상백서옥(想白書屋)’과 ‘말송도서(末松圖書)’의 장서인이 있다.
이통의 자는 원중(愿中)‚ 호는 연평(延平)으로‚ 복건성(福建省) 검포현(劍浦縣) 출신으로 주희의 아버지 주송(朱松)의 친구이다. 양시(楊時)의 제자인 나종언(羅從彦)에게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정이(程頤)의 학문이 이통을 통해 주희에게 전해지는 사승관계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앞부분에 1495년 주목(周木)이 지은 「신교연평답문서(新校延平答問序)」가 수록되었다. 주희는 1157년 28세 때 65세의 이통을 처음 만났고, 『연평이선생사제자답문』에는 이후 7년 동안 스승 이통과 주고받은 편지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처음에는 1157년 주희가 학문에 대해 물은 것에 대해 이통이 음력 6월 26일 답신을 보낸 것이 수록되었는데, 이통은 이 편지에서 『맹자(孟子)』에 나오는 ‘야기(夜氣)’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읽으면 함양(涵養)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다음 편지는 1158년 주희가 『춘추(春秋)』를 읽으며 의심나는 구절에 대해 질문한 것에 대해 이통이 『춘추』를 읽을 때 호안국(胡安國)의 해석을 표준으로 삼을 것을 충고했다. 그리고 주희가 의구심을 가진 『논어』의 구절들에 대해 사례별로 의견을 개진했는데, ‘효’에 대한 문제, ‘안연의 위상’에 대한 문제, ‘위기(爲己)’에 대한 문제 등을 논의했다.
1159년 편지에서는 경전 공부에 전념하는 주희를 격려하면서 유학자들이 지향해야 하는 바가 얼음이 녹아 풀어지는 것과 같은 융석(融釋)의 경지임을 강조했다. 마지막 부분에는 1163년 이통이 71세로 죽기 얼마 전 마음이 드러나는 바로 그 때 본원을 함양하려고 노력하여 점점 마음이 밝아지게 되면 이와 같이 굳고 막혀있는 사의(私意)는 점차 변화될 것이라며 수양론을 피력한 편지가 수록되었다.
『연평이선생사제자답문』에 수록된 편지에는 불교와 신유학의 차이 문제,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해석하는 문제, 인설(仁說),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이일분수(理一分殊) 등 주희가 학문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리학의 주요 개념들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사유 안에서 조합해 나가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주희가 불교철학에 대응해 일상생활에서의 공부와 수양을 강조했던 것은 스승 이통과의 만남과 그와의 논의로부터 성숙된 측면이 크다. 특히 이통은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등으로 대표되는 북송의 신유학을 주희로 대표되는 남송 신유학으로 연결시켜주는 결정적인 매개고리라고 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통과 주희가 주고받은 철학적 논의를 정리한 『연평이선생사제자답문』은 성리학의 성립에 대한 매우 중요한 사상사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두 차례 간행될 만큼 조선의 문인들에게도 성리학 공부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독서로 인식되었던 역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