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비료공장은 1959년 10월에 미국 원조 자금을 이용하여 충북 충주에 요소 비료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된 공장이다. 1950년대에 최대의 수입품이었던 비료는 자립 경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국내 생산 공장을 건설하여 비료 수입을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비료 공장 건설 논의가 정부 내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이것은 원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1954년에 실현되었다. 한국 정부는 비료 공장 건설사로 결정된 MHC와 1955년에 비료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고, 비료 공장은 1959년 10월에 준공되었다.
비료는 1950년대 중요한 수입품 중의 하나였다. 1950년대에 비료에 대한 수요는 매우 컸으나 그 수요를 충족할 비료 공장은 매우 부족하여, 국내에 필요한 비료의 대부분은 해외 수입을 통해 공급되었다. 1950년대에 비료는 미국에서 제공하는 비계획원조(non-project aid)와 일반 무역을 통해 수입되는 금액의 18%를 차지하여 단일 품목으로써 최대의 수입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립 경제의 기반을 조성하려고 했던 이승만 정부는 비료 공장을 건설하여 비료 수입을 줄이고 국제 수지를 개선하고자 1955년 9월에 충주비료공장 건설을 시작하였다.
한국 정부가 비료 공장을 건설하려고 시도한 것은 정부 수립 직후부터였다. 이때의 비료 공장 건설 계획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무산되었지만,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 한국 경제 재건 분위기가 확산된 1952년에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1952년 4월에 정부는 농림부, 상공부, 기획처 관계자들과 국회 농림 분과 위원들로 구성된 '비료공장건설추진위원회'를 설립하여 연 30만 톤의 질산암모늄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1953년에 착공하여 1955년에 완공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어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전후 미국 원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비료 공장 건설 계획이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대외활동본부(FOA) 내부에서 한국에 비료 공장을 건설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1954년 5월에 미국은 연 8.5만 톤의 생산이 가능한 요소 비료 공장을 한국에 건설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이 이후 대외활동본부에서 MHC(MacGrow and Hydrocarbon Co.)를 비료 공장 건설사로 선정한 이후 한국 정부는 MHC와 계약 조건을 협의한 끝에 1955년 5월, 1955년 9월에 비료 공장 건설을 착공하여 1958년 3월에 준공한다는 건설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MHC와의 분규로 공장 건설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1년 7개월이나 지연된 1959년 10월에 비료 공장이 완공되어 시운전 단계에 들어갔지만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비료 생산은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충주비료공장은 1960년 2월에 비료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고,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비료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남한에는 소규모 비료 공장이 3개가 남아 있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 화학 비료 생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식량 증산을 통한 농가 소득이 향상되고, 특히 쌀 수출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등 비료에 대한 수요가 매우 커 1950년대 후반에 비료의 해외 수입은 5천만 불을 상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충주비료공장의 건설은 화학 비료의 국내 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수입 대체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