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시멘트는 1957년 9월에 운크라 자금을 이용하여 건설된 국내 최초의 시멘트 공장이다. 해방 이후 한국에는 연산 8만 톤의 오노다시멘트회사의 삼척공장만이 활동했는데, 이 공장의 생산만으로는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 재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운크라 자금을 이용하여 연산 20만 톤의 문경시멘트 공장을 1957년 9월에 건설하였다. 또한 문경시멘트 공장을 민간 기업에 불하한다는 한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대한양회공업주식회사는 1959년 4월에 이 공장을 인수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에는 1942년 6월에 완공된 조선오노다〔小野田〕 시멘트 회사 삼척공장만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공장의 연 생산 능력은 8.4만 톤이었으나 한국전쟁의 파괴, 시설의 노후, 연료 및 부품의 부족으로 1950년대 상반기까지의 생산은 평균 3만 톤을 조금 상회하는 실적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산업시설, 철도 ·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공공시설, 일반 주택 등의 재건 및 확충을 위해서는 막대한 시멘트를 필요로 하였으나 이러한 시멘트 수요는 삼척공장의 생산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와 운크라(UNKRA)는 운크라 자금을 이용하여 연 생산능력 20만 톤의 시멘트 공장을 문경에 건설하기로 합의하였다.
문경시멘트 공장이 건설되기 이전에 국내 시멘트 소비량은 연평균 8.5만 톤 수준이었다. 이것은 전후 복구와 재건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소비될 것이라고 예상한 40만 톤 내지 60만 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고, 게다가 이 소비량의 절반 정도는 수입을 통해 공급되고 있었다. 자립 경제의 기반을 조성하려고 했던 이승만 정부는 국내에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이 풍부하다는 이점을 들어 운크라 자금을 이용하여 연산 10만 톤 규모의 시멘트 공장의 건설을 1954년 6월에 운크라와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이승만 정부는 공장 규모를 연산 20만 톤으로 확장하기로 변경하고 1955년 2월에 덴마크의 F. L. Smith사와 시멘트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하였다.
1955년 11월부터 문경시멘트 공장 건설은 시작되었는데, 한국 정부는 처음부터 이 공장을 민간 기업에 불하한다는 방침하에서 공장 건설을 진행하였다. 이에 상공부는 공장이 한창 건설 중인 1956년 6월에 ‘기간산업공장 인수운영체 결정요령’을 국무회의에 부의하여 문경시멘트 공장의 민간 불하를 준비하였다. 문경시멘트 공장이 완공된 것은 1957년 9월이었는데, 1956년 11월에 이 공장에 대한 1차 공개 입찰이 진행되었다. 해방 이후 무역업과 군납업 등으로 자본을 축적한 이정림은 1956년 10월에 대한양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개 입찰에 참여하여 1956년 12월에 정부와 가계약을 체결했고, 공장 건설이 완료되고 시운전 단계를 거쳐 공장이 정상 가동된 것을 확인한 이후 1959년 4월에 본계약을 체결하여 문경시멘트 공장을 인수하였다.
문경시멘트 공장이 완공되자 국내 시멘트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였다. 공장 건설 직전인 1956년의 시멘트 생산량은 4.7만 톤이었는데, 문경 공장이 완공되고 시운전 단계를 거친 1958년의 생산량은 30만 톤을 기록하여 이후 시멘트 수입을 대체하여 자립 경제를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3개의 시멘트 공장이 새롭게 건설되어 문경시멘트 공장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1950년대 후반 운크라 자금을 이용하여 건설된 최초의 기간산업으로써 문경시멘트 공장은 한국 경제의 재건 및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