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제철사업은 제선, 제강, 압연의 세 부문을 한 지역에 통합시킨 일관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사업이다. 우리나라에서 종합제철사업은 일찍부터 거론됐지만, 그것이 현실화하는 데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우리나라의 종합제철사업계획은 1958~1969년의 11년 동안 적어도 일곱 차례에 걸쳐 변화했다.
1958년과 1961년에는 기존 업체인 대한중공업을 매개로 종합제철사업계획이 모색되었지만, 모두 문서상의 계획으로 그쳤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에는 한국 종합 제철을 신설하여 종합제철사업을 추진하는 방안이 두 차례 시도되었다. 이전과 달리 실제적인 계약으로 이어졌지만, 차관 조달에 실패하여 이 역시 무위로 끝났다.
1966년 12월에는 미국 중심의 다국적 연합체인 대한 국제 제철 차관단(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 결성되었고, 1967년 4월에는 예비 협정, 1967년 10월에는 기본 협정, 1968년 12월에는 추가협 정이 맺어졌다. KISA와의 협상이 진행되던 1967년 7월에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었으며, 1968년 4월에는 대한 중석을 모태로 하여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1968년 11월에 세계은행은 한국이 종합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내놓았고, 한국 정부는 세계 각국과 광범위한 접촉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KISA와의 협상이 난관에 부딪히자 우리나라는 일본을 파트너로 하여 종합제철사업을 추진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다행히도 일본은 KISA의 회원국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우리나라에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을 지불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1969년 6월 7일에 박정희의 특별 지시에 따라 종합제철사업계획 연구 위원회(일명 종합 제철 건설 기획 실무 전담반)를 설치하여 우리의 손으로 ‘신(新)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실무 전담반은 국내 철강 산업의 현황을 분석하고 세계 철강 산업의 발전 추세를 검토하는 한편, 그동안 국내외에서 작성되었던 계획안을 재검토하여 종합 제철소의 재원 조달, 설비 사양, 생산 공정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작성했다. 1969년 7월 22일에 완성된 신사업 계획은 생산 규모를 103만 2,000톤으로 확대하여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리고자 했으며, 향후에 500만 톤 이상의 규모로 제철소를 확장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산 공정을 배치했다. 신사업 계획의 작성은 공식적으로는 경제기획원이 총괄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주도했다. 특히 KIST의 금속 가공 연구 실장이던 김재관은 연구 책임자를 맡아 신사업 계획을 종합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신사업 계획은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새로운 차관 조달선으로 지목된 일본과 협상을 추진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했다. 1967~1968년에는 KISA가 먼저 사업 계획의 초안을 제출하고 한국과 KISA가 협상을 통하여 이를 수정, 보완하는 절차를 거쳤던 반면 1969년에는 한국이 먼저 사업 계획의 초안을 작성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과 협상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사업 계획을 바탕으로 한국의 실무진은 1969년 8월에 일본의 관계자들을 일일이 설득하여 결국 제3차 한일각료회담을 통해 일본의 협조를 끌어냈다. 이어 1969년 12월에는 「포항종합제철건설에 관한 한일간 합의서」가 체결됨으로써 포항제철소 건설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1958~1969년에 종합제철사업계획이 계속 변화하는 동안 제철소의 규모는 20만 톤, 30만 톤, 60만 톤을 거쳐 103만 톤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 포항제철소는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제철소 건설에 소요되는 전체 비용은 증가했지만, 톤당 투자 비용은 훨씬 저렴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1969년의 시점에서 일본이 협력 파트너로 결정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한국의 철강 산업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1960년대까지 세계 철강 산업을 주도해 왔던 미국은 점차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반면 일본은 1970년을 전후로 세계 최고의 기술과 경쟁력을 갖춘 철강 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