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목재의 전신은 1925년 4월에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설립된 동명제재소다. 동명제재소는 1945년 11월에 범일동 공장을 준공했고, 1949년 1월에 동명목재상사로 거듭났다. 동명목재는 1960년 4월에 남구 용당동 공장으로 이전한 후 전성기를 누리다가 1980년 6월에 해체되었다.
강석진은 1949년 1월에 동명제재소를 동명목재상사로 개명하면서 제재 사업에 이어 합판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1950년에 시작된 6·25 전쟁은 동명목재에게 좋은 기회였다.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전쟁 물자 조달의 일환으로 합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동명목재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전쟁 후 복구 사업이었다. 재건과 복구는 건축 경기의 활성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합판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증가했다.
1959년에 동명목재는 인도네시아에서 열대 지방의 원목인 라왕(羅王)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우리나라 군대가 동명목재에 합판의 납품을 요청했고, 주한 미군도 이를 뒤따라 납품을 요청했다. 게다가 1960년에는 미국에서 동명목재의 합판을 수입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미국의 바이어가 요구한 것은 합판의 겉면을 플라스틱 계열의 재료로 덮어 강도, 내화성, 내구성 등을 강화한 미장 합판(美粧合板)이었다. 일본에서 고급 합판 시방서를 구입하여 열심히 연구한 끝에 동명목재는 1961년 5월에 미국으로 26만 3천 달러의 합판을 수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1960년 4월에는 용당동에 새로운 공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1963년 12월에는 제1합판 공장이 완공되었는데,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의 합판 공장이었다. 이어 1967년에는 제1가공합판 공장, 포르마린 공장, 제2합판 공장, 1968년에는 제2가공합판 공장, 1972년에는 파티클보드 공장, 1973년에는 고무 롤러 공장과 페인트 공장, 1974년에는 제3합판 공장과 화학가공 공장이 준공되었다. 이로써 동명목재는 합판의 대량 생산 체제를 처음으로 구축했는데, 3 곳의 합판 공장으로 하루 17만 장을 생산하는 능력을 보유했다.
동명목재의 성장은 계속되었다. 매출액은 1965년에는 50억 원에 달했던 것이 1970년의 약 100억 원을 거쳐, 1976년에는 500억 원을 넘어섰다. 재직자 수는 1969년에 약 4천 명이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78천 명에 이르렀다. 1977년을 기준으로 동명목재는 부산, 서울, 경북, 경남 등 전국적으로 77개의 대리점을 두고 있었다. 또한 동명목재는 19681971년에 4년 연속으로 전국 수출액 1위를 달성했으며, 1977년에는 합판 수출액 1억 달러를 돌파했다.
강석진은 동명목재를 바탕으로 1974~1979년에 여러 회사를 차례로 설립하여 소위 ‘동명그룹’을 형성했다. 동명산업(1974년), 동명해운(1977년), 동명개발(1977년), 동명중공업(1978년), 동명식품(1979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동명그룹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신(新)군부 세력은 정경 유착에서 발생한 비리와 부조리를 척결한다는 명분 아래 강석진을 반사회적 악덕 기업인으로 몰아세웠다. 이로 인해 동명목재는 1980년 6월 27일에 문을 닫았고, 동명그룹에 속한 모든 기업들이 해체되고 말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학교 법인 동명문화학원뿐이었다.
합판은 19641972년의 9년 동안 우리나라 총 수출액의 10% 이상을 담당했다. 또한 한국은 19701981년에 합판 수출량 면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합판 산업의 성장을 이끈 기업은 합판의 대량 생산 체제를 처음 구축했던 동명목재였다. 동명목재는 한국의 합판 생산량에서 1970년 31.2%, 1973년 24.6%, 1977년 22.1%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