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선(尹趾善)
1683년에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형조참판·대사헌에 이어 이조참판·광주유수(廣州留守)·한성부좌윤을 지냈다. 1694년 병조판서로 지의금부사, 이듬해 판의금부사·지경연사(知經筵事) 등을 겸임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를 지내고, 1696년에 공조판서·좌참찬·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9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영중추부사를 거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이르러 77세로 죽었다. 성품이 온건하고 원만해 당쟁의 와중에 휩쓸리지 않았다. 복제설(服制說) 시비로 송시열(宋時烈)이 덕원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도 모나지 않으면서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한 소를 올려, 경직된 정국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숙종이 장희빈(張禧嬪)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려 하면서 여기에 반대하는 자는 벼슬을 내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