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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학파(江華學派)

    유교개념용어

     조선후기 강화도에 은퇴해 학문을 닦은 정제두의 양명학적 학풍을 가리키는 유교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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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강화도에 은퇴해 학문을 닦은 정제두의 양명학적 학풍을 가리키는 유교학파.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참된 자아를 확립하려는 정신태도를 견지하면서, 국학의 제반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경전을 재해석하는 작업에서 높은 수준을 이루었다. 즉 그들은 참된 자아의 각성과 생활 속의 실천을 중시하는 순수 동기주의를 추구하였다.
    학술의 내용으로 보면, 그들은 정제두 이래로 양명학을 수용하고 도교와 불교까지 섭수(攝收)하고자 했고, 이학(理學)보다는 한학(漢學)을 연구하고 동시에 국학(國學)을 일으켰다.
    양명학파는 소론이라는 당색과 상호간의 혈연적 관계로 인해 250년 간 학맥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양명학을 수용하되 특정 문호를 세우지 않고 전내실기(專內實己)주 01)의 실학(實學) 전통을 지켰다.
    양명학파는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소화했으며, 훈민정음연구·국어학·국사학·서법(書法)·문자학·문헌학 분야에서 탁월한 논저들을 남겼다.
    이를테면 서법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국사학에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과 매천(梅泉) 황현(黃玹), 한학(漢學)에 석천(石泉) 신작(申綽), 훈민정음연구에 서파(西陂) 유희(柳喜), 문자학에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 남극관(南克寬) 등 오늘날 국학 분야에서 거론되는 선구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학맥에 속한다. 홍양호(洪良浩)나 이종휘(李種徽)같은 학자들도 이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
    본래 강화학파에 대해서는 정인보(鄭寅普)가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국학산고(國學散藁)』에서 그 학문적 성과를 일정하게 평가한 적이 있다.
    이후 민영규(閔泳珪)가 1988년 3월 15일부터 연세대 국학연구원 자료연구실에서 행한 ‘강화학(江華學)과 그 주변’이란 강의에서 그들의 학적 전승 관계를 구체화하기 위해 ‘강화학파’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창하였다.
    강화학파는 소론(少論)의 가계(家系)를 통해 이어졌다. 영조의 탕평정국에서는 소론도 일정하게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준소 계열은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의 이진유(李眞儒)가 김일경 옥사에 관여되어 있었으므로 영조 초에 정치권에서 축출당했다.
    또 이인좌(李麟左)의 난, 기유처분, 반야하교(半夜下敎) 파동, 경신처분을 거치면서 더욱 타격을 받다가, 1755년(영조 31)의 나주괘서사건(을해옥사)에 이진유의 다음 세대인 이광신(李匡臣)·이광려(李匡呂)·이광찬(李匡贊)·이광사·이광명(李匡明) 등이 모두 연좌되어 집안이 몰락하였다.
    이들은 가난(家難)을 겪으면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새삼 탐구하게 되며, 강화도로 이주해 정제두의 양명학적 사유를 수용하였다. 그들은 심학(心學)으로서의 ‘실학(實學)’을 연찬했고, 또 노장(老莊)철학에서 가식을 배제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지향을 받아들였다.
    이광신은 정제두 심학의 적전(嫡傳)으로서, 정제두의 저술을 교정하고 선사(繕寫)했으며, 「의주왕문답(擬朱王問答)」·「논정하곡학문설(論鄭霞谷學問說)」에서 정제두의 학문 성향을 정면으로 거론하고 그 계승자임을 밝혔다.
    이광신은 하곡이 양명학을 배운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회암과 양명의 차이가 ‘격(格)’의 해석에 있을 뿐이라고 하고, 그 둘은 방편적(方便的) 차이밖에 없으며 강색(講索)과 존성(存省)은 궁극적으로는 보합한다고 변론하였다.
    이광사는 『서결 書訣』을 남기고 동국진체(東國晉體)를 확립한 서법가(書法家)이면서 동시에 강화학의 정신을 문학과 논문으로 표출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다. 이에 비해 그의 종형제인 이광찬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광려는 양명의 학설을 숙지하고 있었으나, 양지설에 대해서는 『대학』의 본뜻은 아니라고 보는 등 다소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광사의 둘째 아들인 이영익(李令翊)은 정제두의 손자사위가 되었는데, 그는 정제두의 심학을 비교적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이영익은 제종형제 이충익(李忠翊)과 함께 주학(朱學)과 왕학(王學)을 변석하고, 『상서』의 금고문(今古文) 문제를 논하는 등 지적 관심사를 확대하였다.
    이충익은 왕학을 전공했고 결국 불교에 심취해 『초원담로 椒園談老』를 이룬 데 비해, 이영익은 양명학을 자득해 주체의 존재 양식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의식의 ‘방랑(放浪)’을 염려하였다.
    이영익은 ‘방랑’을 중지하기 위해 주자학적 격물치지의 공부를 도입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으로 되돌아갈 뜻이 없었으므로 경학 연구나 국학에 정렬을 쏟았다.
    이영익은 『주역』과 고문상서(古文尙書)의 연구에서 한당(漢唐)의 고주(古注)를 살펴서 경전의 본뜻에 직접 접근하려고 했는데, 그 시도는 뒷날 신작의 삼차고(三次故)로 결실을 맺는다.
    이영익의 형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을 편찬해, 국사에 대한 연찬에 주력하였다. 그 원집(原集)과 별집(別集)은 조선후기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하게 읽혀서, 야담이나 패사를 정리해 조선의 역사를 탐구하고 조정 정책의 향배를 제시하려는 ‘외사(外史)’들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자극을 주었다.
    강화학파를 이룬 또다른 가계(家系)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즉 신대우(申大羽)는 정제두의 손자사위로서, 강화도로 이주해 정제두의 학문을 이었다. 그도 정제두의 유집(遺集)을 정리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다만 심학과 관련된 논문은 남기지 않고 산문 창작에 치중해, 인간의 문제를 문예적 산문으로 표현해내었다.
    신대우는 중년 이후에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고, 세째 아들인 신현(申絢)이 관료로 성공하자 경기도 광주 사촌(社村)에 세거지(世居地)를 마련해, 그 일문은 경화거족(京華巨族)에로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당파 간의 이해 대립이 첨예한 현실을 사도(斯道)의 쇠미 현상으로 규정하고 그 폐단을 구할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였다.
    신대우는 전내실기적인 삶을 실생활에서 추구했고 함축성이 높은 산문 문학을 제창하였다. 신대우의 둘째 아들 신작은 일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문헌 집성의 방법을 활용해 경학 연구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려, 조선 학술사에 유례가 없는 박학(樸學)의 종(宗)이다.
    신작은 경학에서는 『시차고 詩次故』·『역차고 易次故』·『서차고 書次故』의 삼차고를 저술했고, 별도로 『춘추좌전례 春秋左傳例』를 집필하고 『의례 儀禮』를 연찬하였다.
    또한 박세당(朴世堂)의 『노자주』와 이충익의 『초원담로』로 이어지는 노자 연구의 전통을 이어 『노자지략 老子旨略』을 집필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 서로 학술 토론을 전개해 연구를 심화시켰다.
    신현(申絃)은 정조 때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정조의 학문 진작에 협찬했고, 순조 초까지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정제두의 문인으로 심육(沈錥)과 이진병(李震炳)이 있었다.
    심육은 학문적인 후계를 갖지 못했고, 그의 아우(鑰·鉍·鈸) 형제는 모두 을해옥사에 연좌되어 노(奴)가 되거나 유배를 당함으로써 그 형의 학문이 계승될 수 없었다.
    다만 심육의 부친 심수현(沈壽賢)에게서 수학한 홍양호가 강화학파와 일정한 연관을 맺었고, 그 가학이 구한말의 홍승원(洪承憲)에게로 이어졌다. 또한, 심수현의 후손에 심대윤(沈大允)이 경학 연구에서 창신(創新)을 이루었다.
    조선후기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양명학을 수용한 학자 문인들은 많았지만, 강화학파는 그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가학(家學)의 형태로 계승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정제두는 이기(理氣)의 개념을 빌어다가 심(心)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이후의 강화학파 학자들은 이기론(理氣論)의 틀을 점차 벗어났다. 이광사가 「논동국언해토(論東國諺解吐)」에서 한글 언토(諺吐)에 관해 논한 것은 강화학파의 학문이 국학으로 전회하는 기원을 이루었다.
    그들은 이후 박학(樸學)으로 학문적 관심을 넓혔고, 시문에서 올바른 인간상을 제시하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부합시키려 했으며, 전통 가치와 학술 내용을 회의하고 재구성하였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현실의 모순이나 제반 문제를 직접 언급할 수는 없었지만, 강화학파의 시문은 그 자체가 현실을 바로잡겠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때로는 실제 현실의 문제에 대해 우회적인 방법으로 비판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하였다.
    강화학파 가운데는 학술적 저술보다 시문으로 사상 내용을 형상화해 담아낸 문인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은 전내실기를 중시했으므로, 시문에서도 수식을 배격하고 효제(孝悌)와 행의(行誼)에서 우러나온 문학을 우위에 두고 경술문장일치(經術文章一致)를 추구하였다.
    특히 문학을 전공한 인물로 이광려와 신대우는 당대의 평가를 받았다. 이광려는 각의도련(刻意陶煉)한 단형의 시로 맑은 심상(心象)을 표출했고, 신대우는 보기 드문 의고파(擬古派) 산문가였다.
    또한 강화학파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진성측달(眞誠側怛)○의 태도를 지녔기에, 가난(家難)을 당한 여성의 고초에 눈을 돌려 비지문(碑誌文)이나 애제문(哀祭文) 혹은 회상시와 서한시에서 그 아픔을 다루었다.
    그리고 지방 풍정과 민족 역사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이광명(李匡明)은 유배지인 갑산(甲山)의 지리와 풍속을 한글 산문 「이쥬풍속통」으로 서술했고, 이광명의 계자(系子)인 이충익은 죽지사체(竹枝詞體)인 「이산잡시 夷山雜詩」 10수로 갑산의 풍정을 읊었다. 이광사는 연작영사시(連作詠史詩)인 「동국악부 東國樂府」를 지었고, 그 아들 이영익은 그것에 차운하였다.
    구한말에 이르러 이건창(李建昌)과 황현은 우국의 정신을 담고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강화학파의 덕천군파 가계는 철종이 등극하면서 이시원(李是遠)이 징사(徵士)로서 중앙권력에 편입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복권되었다. 판서직까지 지낸 이시원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에 고령이면서도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자결해 외침에 대한 대처를 촉구하였다.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과 함께, 정원하(鄭元夏)·홍승헌(洪承憲)·이건승(李建昇)·이건방(李建芳)이 정제두의 유풍을 흠모해 강화도로 모여 함께 강학을 하여, 새로운 학문 방법과 현실 대처 방안을 토의하였다.
    명성황후(明星皇后) 시해 사건이 있었을 때 이건창은 홍승헌·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궐문에 나아가 「청토복소 請討復疏」를 올렸고, 당색의 제한 때문에 정치 이념을 구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체험하고는 붕당정치사인 『당의통략 黨議通略』을 집필하였다.
    이건창의 아우 이건승은 황현과 교유한 문인으로, 이건창·이건방이나 마찬가지로 갑오정국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홍승헌·정원하와 함께 자결을 결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건승은 1906년에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해 교육구국 운동을 전개했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지지하였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정원하의 뒤를 따라 만주의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였다.
    강화학파의 문인 학자들은 지적 결벽성을 지녀, 일제의 강제 합병에 접해 자결을 하거나 국외로 망명하였다. 이건창이 이은 조선 양명학의 정신, 민족자주의 이념은 정인보에 의해 계승되어 큰 줄기를 이루었다.
    강화학파는 양명학 일색은 아니다. 정인보가 강화학을 포함한 조선 양명학도의 존재를 지적하고, 그 논리 구조를 밝히고자 했을 때는 일제에 부용하는 학문 자세를 허학(虛學)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힘으로써 양명학적인 실학의 이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강화학파의 학문이나 사상의 저류에는 윤리 주체로서의 인간을 고려하는 양명학적인 지향이 큰 줄기를 이룬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내수(內修)를 주장해 자기 내면을 오로지 하고 충실히 하라는 가르침을 강화학파의 삶과 문학과 학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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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01
    내면을 오롯하게 하고 자기에게 충실할 것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8년)
    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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