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명 삼존천불비상은 충청남도 연기군 서광암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비상은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비석 형식이다. 비석 몸체 부분은 4면으로 이루어졌다. 앞면의 삼존상을 중심으로 옆면·뒷면에 900여 구의 작은 불상들이 가득 배열되어 있다. 이는 천불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삼존상 좌우에 있는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계유년에 백제 귀족 유민 250명이 조성한 것이다. 이 비상은 백제의 불상 양식을 계승하려는 백제 유민들의 의지가 충실히 반영된 작품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0년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 있는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것으로, 일명 서광암 삼존천불비상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부근의 옛 절터에서 서광암으로 옮겨졌다고 전하고 있어 확실한 원위치는 알 수 없다.
이 석비상(石碑像)은 통일신라 때 연기 지방을 중심으로 조성된 이른바 ‘연기파(燕岐派)’ 불상 조각 중 가장 크다. 이 비상은 낮은 기단 위에 장방형의 비신(碑身)이 수직으로 세워진 전형적인 석비형 비상이다. 비신부는 4면으로 이루어졌으며, 앞면의 삼존불좌상을 중심으로 옆면 · 뒷면에까지 작은 불상을 가득 배열하고, 좌우로 조상기를 적고 있다.
연화문이 새겨진 보주형 광배(寶珠形光背)를 지닌 본존은 통견(通肩)의 법의를 입고 방형 대좌에 결가부좌하였다. 머리 부분은 파손되었고 가슴에는 ‘卍’자를 새겼다. 손 모양은 같은 해에 제작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국보, 1962년 지정)과 같은 수인(手印)이다.
연화가 조각된 둥근 두광(頭光)을 지닌 좌우 두 협시보살은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인 X자형으로 교차된 천의(天衣)를 걸쳤다. 이들의 얼굴은 마멸되었으며 직립한 자세로 연화좌 위에 서 있다. 이 중 오른쪽 보살은 오른손에는 긴 연꽃송이를 쥐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 그러나 왼쪽 보살은 마멸이 심하여 무엇을 쥐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이 비상에는 삼존상 외에 앞면 · 뒷면 · 옆면 및 옥개석(屋蓋石)까지 여러 단으로 면을 구획하여, 소형의 불상을 빽빽이 배치하고 있다. 작은 불상들은 모두 두광을 지니고 통견의 법의에 선정인(禪定印: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앞에 모은 손 모양)을 한 상들이다. 그 숫자가 거의 900여 구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천불신앙(千佛信仰)에 따른 천불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천불신앙은 중국 북위(北魏) 때부터 그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의 조상명(造像銘)에 그 불명(佛名)이 처음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금동 연가7년명 여래 입상(국보, 1964년 지정)과 원오리 출토 소조불(元吾里出土塑造佛)의 예로 미루어 6세기경부터 그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독상이 아닌 천불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으로는 이 비상이 가장 오래된 예가 아닌가 한다.
삼존상의 좌우에 각각 4행씩 세로로 선을 그어 해서(楷書)로 명문이 적혀 있다. 명문에 의하면 계유년에 ‘대사 진모씨(大舍眞牟氏)’ 등 250명이 국왕 · 대신 및 칠세부모(七世父母) 등을 위하여 아미타불과 여러 불보살상을 만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불상이 제작된 연기 지방이 신라통일 후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든지, 삼존상에 나타나는 삼국시대의 불상 양식, 가령 보살의 X자형의 천의라든가 삼국시대의 연꽃무늬 등이 앞 시대 양식을 따르는 점으로 보아, 여기에서 말하는 ‘계유년’은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과 마찬가지로 삼국통일 직후인 673년(문무왕 13)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러한 점은 비상의 발원자인 ‘진모씨’ 등이 백제 성을 따르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이 석불비상은 백제 귀족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유민이 망국의 한과 심각한 장래를 걱정하면서, 칠세부모라는 상징적인 전체 백성들에게 호소하고, 아울러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향도(香徒: 화랑도)가 되어 조성한 불상이다. 백제의 불상 양식을 계승하려 한 백제 유민들의 의지가 충실히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