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기독교의 경우에 사용되며 예배당(禮拜堂)·성전(聖殿)이라는 용어도 쓰이나, 이때는 건물 자체만을 뜻한다. 특히, 가톨릭에서는 건물에 대한 호칭일 경우 성당(聖堂) 혹은 본당(本堂)이라는 용어를 통용하였기 때문에 흔히 개신교의 집회장소에 한정해서 쓰였으나, 최근에는 가톨릭에서도 공식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교회는 ‘퀴리아콘’이라는 용어에서 유래하는데, 이 말은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밖에 ‘만남’이나 ‘모임’을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말도 교회의 어원이 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인 공동체로 고백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은 ‘선택된 자’이고, ‘따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호칭은 그러한 구성원에 대한 종합적인 지칭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성서』는 직접적으로 교회가 어떤 것이라고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 다만 ‘포도원’이라든가 ‘목자와 양떼’라든가 하는 상징적 서술로 교회의 속성, 곧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생활공동체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교의적인 입장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교회의 본래적 성격에 대한 정의가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성한 삶의 공동체인데 그렇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어야 하며, 신앙의 고백과 세례예식에의 참여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서로 형제애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 신비로운 몸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정의이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그러한 신비체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은총을 그 조직체의 형성원리로 수용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삼고,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의 기능으로 이해하는 데 이른다.
그리하여 교회는 제도화된 기구로서 역사적·사회적 실재가 된다. 땅 위의 교회라고 일컬어지는 이러한 가시적(可視的)인 교회는 초역사적인 신비체로서의 불가시적 교회와 표리를 이룬다.
가시적 교회는 그것이 자리하고 있는 문화적 맥락과 그 공동체의 지도력이 가지는 특성에 따라 신비체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의 표상도 다양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것 자체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적 특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초지역적이고 초시간적인 종교적 이념을 아울러 공유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제각기 다른 동방교회, 서방 혹은 라틴교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등의 다른 교회전통을 형성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교회가 창설된 것은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중국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정약전(丁若銓) 등과 신앙공동체를 구성한 것이 그 효시이다.
가톨릭교회인 이 최초의 그리스도교공동체는 1786년에는 스스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실천하여 독자적인 한국천주교회를 수립하기도 하였으나, 곧 선교사의 파송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교회구성을 중단하였다.
1801년 대박해를 거치며 교회는 거의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교회 재건에 힘쓴 결과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됨으로써 북경교구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현재 천주교회는 서울·대구·광주의 3대 교구와 그에 속한 16개 교구(함흥·평양 포함)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모두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구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
각 교구는 원칙적으로 각기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전국적인 차원에서 교구간의 협력이 요청되거나 공동관심사를 논의하기 위한 주교회의를 구성한다. 이것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이다.
주교회의는 기능상 완전한 협의체로 운영되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기구라고 할 수는 없으나, 교황과의 관계 및 교회 밖의 대정부·대사회관계에서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대표함으로써 실질적인 중앙기구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 기구는 주교회의와 주교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자에는 추기경이 의장 및 총재로 있는 의장단·상임위원회·사무처·출판사업부서가 있고, 후자에는 교리·성직·사목(司牧)·사회 등의 주교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프로테스탄트인 개신교가 처음 교회를 세운 것은 1884년 황해도의 솔내에서 서상륜(徐相崙)에 의해서였다. 그 뒤 각 교파에 따라 제각기 교회가 세워졌는데, 교회가 하나의 제도적인 조직으로 구체화된 것은 1887년 장로교회가 처음이었다.
개신교교회의 설립은 다양한 선교활동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뒤의 일이었으나, 외래선교사들은 주도권을 갖지 못했으며, 천주교와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는 점들이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개신교의 교회들은 종교공동체로서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변혁을 주도한 사회세력으로서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특히 교육·의료·한글보급, 그리고 새로운 인간관의 제시를 통하여 근대적 이념을 고취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점차 외국의 여러 교파들이 들어와 경쟁적으로 선교를 시행한 결과 다양한 교파가 형성되었고, 신학의 주장이나 여타 사회적 요인들로 인하여 교회나 교파들이 이합집산하면서 70여 개 교단에 이르고 있다.
각 교파는 제각기 다른 교회운영의 행정조직을 지니고 있다. 장로교회는 개별교회를 위한 당회, 지역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노회, 전국적인 차원의 총회가 있다. 각각의 회의에서 목사와 평신도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 감리교회는 당회·구역회·지방회·연회·총회로 구분된다. 중앙행정기관은 총리원(總理院)이고 감독이 그 책임을 진다.
전통적으로 교회정체(敎會政體)는 군주형(서방교회·로마가톨릭)·귀족형(동방교회·그리스정교회)·의회형(루터교)·감독형(영국성공회)·회중형(침례교)·장로형(장로교)·절충형(감리교) 등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그 전통을 제각기 전승하고 있으면서도 대체로 상호보완적인 정체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보다 중요한 측면은 교회와 국가 및 사회와의 관계이다. 교회는 그 자체가 지닌 신비체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자의식으로 인하여 국가나 사회의 이념이나 현실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를 제시하기도 하고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교회의 이러한 속성은 국가권력과의 유착이나 갈등, 사회현실과의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의 수난은 사회가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와의 마찰과 정치권력과의 갈등 등이 그 주요한 원인이었는데, 전자의 예로 신해교난(辛亥敎難)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는 병인교난(丙寅敎難)을 들 수 있다.
초기의 개신교는 가톨릭의 입장과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여 표면적인 갈등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국가나 사회와의 관계를 종교적 신조를 통하여 전개하지 않고 의료·교육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과 강점기에 개신교교회는 민족적인 항쟁의 본거지였으며, 일제에 의하여 가장 심한 핍박을 받은 사회공동체의 하나였다.
1919년의 3·1만세운동으로부터 신사참배 거부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몇몇 교파는 실제로 교회를 폐쇄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1960년의 4·19혁명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교회를 구체적인 사회적 실체로 가진 그리스도교는 사회 및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기능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유착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국가이념의 정당화나 사회규범의 실질적인 제시자가 되지 못한 채 지속된 이러한 교회의 태도에 대한 심각한 자성은 196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사회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교회가 현존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전통문화 내지 다른 종교와의 만남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어떻게 지양하고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교회가 지도하고 요청하는 신도의 생활규범은 대체로 전통문화의 가치나 이념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아울러 타종교에 대한 태도도 부정의 논리에 근거한 개종강요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가톨릭교회나 개신교는 다 같이 그리스도교 복음의 이른바 토착화문제를 심각히 논의하고 있다.
교의적 해석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신학, 실천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성례(聖禮)와 기타 의식, 그리고 생활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구조와 관리에 이르기까지 제반 문제가 전통문화나 우리의 사회적 정황과의 관련에서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고, 그러한 결과는 예를 들어 민중신학, 성례언어의 우리말화, 제사의 수용, 세시풍습을 교회력에 담는 일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른 종교와의 관계 역시 신학적 차원에서의 논리적인 대화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실질적인 생활의 차원에서도 극히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
이는 교회일치를 주장하는 에큐메니즘이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태도로서 논의된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교회들이 각성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사회·문화적 정황 자체가 종교다원사회를 불가피하게 승인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에큐메니즘이 제반 종교간의 만남에 대한 의도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음을 볼 때 이런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 문제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전체가 복음주의적 보수교회와 현실적·참여적 급진교회로 분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