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몽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사헌부장령,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숙무(叔武)
옥봉(玉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7년(명종 12)
사망 연도
1637년(인조 15)
본관
강릉(江陵)
주요 관직
정언(正言)|지제교(知製敎)|어천찰방(魚川察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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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몽호는 조선 후기 사헌부장령, 공조참의, 어천찰방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09년(광해군 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오고 지방 수령도 지내며 문한직을 역임하는 등 순조로운 승진하였지만, 인목대비 폐비와 관련된 소문으로 정경세와 함께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은퇴하였고 인조반정 후에도 관직에 다시 나가지 않았다.

정의
조선 후기 사헌부장령,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숙무(叔武), 호는 옥봉(玉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김윤신(金潤身)으로 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냈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세달(金世達)이다. 할아버지는 김광언(金光彦)으로 예빈 직장을 지냈고, 아버지는 김수(金鐩)이며, 군자감 주부를 지냈다. 어머니는 강릉최씨로 최현석(崔賢錫)의 딸이다. 부인은 장민(張旻)의 딸인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주요 활동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609년(광해군 1) 문과에 급제하였다. 천추사(千秋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에 예조정랑을 지냈다. 평안도도사를 지냈고 후에 형조정랑을 지냈다. 1613년 정언(正言)에 임명된 후 지평(持平), 장령(掌令), 필선(弼善), 군자감 및 장악원 정(正), 지제교(知製敎) 등을 지냈다. 1615년 어천찰방(魚川察訪)을 역임하였다.

광해군대에 심경(沈憬)의 무고로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심문을 받았으나 근거가 없어 석방되었다. 즉, 심경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은연중에 장차 모후(母后)를 폐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였다. 이 말이 광해군의 귀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서 심경이 심문을 받으면서 김몽호와 정경세에게 들었다고 말하였는데, 이 때문에 엄히 심문을 받았다.

이후 강릉 경포대의 호해정(湖海亭)으로 물러나 여생을 보냈다. 인조반정(1623) 직후에 공조참의에 임명되자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편지를 보내 조정에 나올 것을 권하였지만, 나가지 않았다. 묘소는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리 산 15번지에 자리한 경인재의 전사청 앞에 있다.

참고문헌

원전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조현명, 「동지김공묘갈명(同知金公墓碣銘)」(『귀록집』, 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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