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기원(起元), 호는 당헌(棠軒). 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생.
1907년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상경하여 신민회(新民會)에 몸담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목사 한석진(韓錫晉) 등과 승동학교를 경영하는 한편,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 때 민족운동에 관여하다가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임시정부 군무부원 및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과 비서장을 역임하였다. 1921년 안창호(安昌浩)와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창설하였으며, 1924년 상해 법정대학을 마쳤다.
1928년 상해 대한인교민회 제5대 단장을 거쳐 1930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경영을 맡아 ≪독립운동사≫ 편찬에 관여하는 한편, 상해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이동녕(李東寧) · 김구(金九) · 안창호 · 조완구(趙琬九) · 차이석(車利錫) 등과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약하였다. 1933년 중국 국민혁명군 상교(上校) 참의(參議)로 한중 양국의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1935년 한국국민당 간부로 활약하면서 1938년 흥사단 원동위원장을 거쳐 이듬해 임시정부 제15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1940년에는 한국독립단 위원으로 조소앙(趙素昻) · 지청천(池靑天) · 김학규(金學奎) · 엄항섭(嚴恒燮) · 유동열(柳東說) 등과 활약하였으며, 1943년부터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계속 활동하다가 8·15광복으로 11월 임시정부요인들과 환국하였다.
1946년에는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 최고정무위원을 거쳐 같은 해 12월 7일 미군정 입법기관인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헌법 · 선거법 기초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김규식(金奎植) · 여운형(呂運亨) · 원세훈(元世勳) · 최동오(崔東旿) · 안재홍(安在鴻) 등과 6인합작의원에 선출되어 좌우 합작위원회 우파 대표로 민족통일운동에 기여하는 한편, 신진당(新進黨)을 창당하였다.
1948년 민족자주연맹 상임위원 및 선전국장으로 남북협상에 관여하였고, 5·10선거에 낙선되는 비운 속에 6·25 한국전쟁을 당하여 7월 27일 납북된 뒤 그 해 9월에 작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