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1점. 남은이 태조연간에 자손에게 재산 분배에 관해 남긴 유서 1점과 1415년 9월 21일에 국왕이 남재에게 ‘개국공신 의령부원군 수문전대제학(開國功臣宜寧府院君修文殿大提學)’ 등의 관작을 제수하는 고신왕지(告身王旨) 모사본(摹寫本) 1점을 첨부해 1993년 9월 10일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지정해제 되었다.
유서와 왕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남은 유서(분재기): 필사본(원본). 1장. 세로 24㎝, 가로 59.5㎝. 이 문서는 남은이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당시의 급박한 정세에 대비해, 자기가 죽은 뒤 모든 일의 처리에 관한 것을 자손에게 부탁하는 자필유서이다.
조상의 봉사(奉祀)에 관한 문제와 재산 분배가 주된 내용이므로 분재문서의 성격을 겸하고 있다. 유서는 총 35줄에 걸쳐 초서체로 쓰여졌는데, 그 내용이 28줄, 재주(財主)와 증보(證保)를 밝힌 것이 7줄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남은이, 자기의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우니, 가산을 골고루 나누어 가지고, 하사받은 전답과 노비를 자손에 소유하며, 조상의 훈업(勳業)을 추모해 언행을 삼가고 제사를 잘 받들 것과 하사받은 금·은대(金銀帶), 은병(銀甁), 채옥장종(彩玉長種)은 모두 적장(嫡長)의 집에 전수하고, 후손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여 뒤를 잇도록 하라’는 등의 유언을 작성한 것이다.
문서 뒤에, 재주(財主) 부(父)(手書), 개국공신 남은(南誾)(手決), 모(母) 가순택주김씨(嘉順宅主金氏)(圖書)가 있으며, 증보(證保)로는 형 개국공신 남재(南在), 9촌질 개국공신 함부림(咸傅林)(手決) 등 4인이 서명, 수결하고 있다.
이 문서는 조선 초기의 유서로서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크며, 조선 초기의 정치·경제·사회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② 남재 왕지: 1점. 필사본. 세로 23㎝, 가로 85.7㎝. 1415년 9월에 국왕이 남재에게 ‘순충분의동덕개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령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세자부(純忠奮義同德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宜寧府院君修文殿大提學世子傅)’ 등의 관작을 내리는 고신왕지이다.
총 11줄에 걸쳐 초서체로 쓰여졌는데, 새보(璽寶)가 찍히지 않은 당시 왕지의 모사본이다. 이 문서는 모사본이기는 하나 조선 초기의 관제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 문서는 조선 초기 정치·경제·사회·관제 등의 여러 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임은 물론, 남은·남재의 전기 자료이기도 하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의령남씨 문충공파 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