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예숙(豫叔). 박신동(朴信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중검(朴仲儉)이고, 아버지는 판서 박세무(朴世茂)이며, 어머니는 권잉(權仍)의 딸이다.
1555년(명종 10)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승정원주서(承正院注書)가 된 뒤, 정자(正字)·수찬(修撰)·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당시 명종의 총애를 받던 척신 이량(李樑)과 사이가 나빠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량이 술책을 써서 자기 아들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로 뽑히게 한 뒤 전랑(銓郞)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상피제(相避制: 친족이나 기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자들 사이에 같은 곳에서 관직생활을 피하게 하던 제도)에 의해 아들이 취임하지 못하고 아들의 친구인 유영길(柳永吉)이 후임으로 추천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좌랑(佐郞) 윤두수(尹斗壽)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다.
이문형(李文馨)·허엽(許曄)·기대승(奇大升) 등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국정을 전단하는 이량과 이감에 의해 “부박(浮薄: 마음이 들뜨고 가벼움)하며 선동한다.”는 죄명으로 관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다시 부교리(副校理)로 복직되었다.
1567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재직하던 중 명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원상(院相: 나이 어린 왕을 보좌하던 원로재상) 이준경(李浚慶), 도승지 이양원(李陽元) 등과 같이 덕흥군(德興君)의 셋째아들 선조를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워 대사성이 되었다.
1571년(선조 4)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