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흥(義興). 자는 양백(養伯), 호는 임호(林湖). 박경심(朴景諶)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조석윤(趙錫胤)·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특히 조석윤에게서 배운 바가 커 문명을 떨쳤다.
그 뒤 송시열을 사사하여 사서·육경과 정주학설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주역』과 『중용』 연구에 진력하였다. 1662년(현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학록(學錄)·학정(學正)·전적 등을 거쳐 예조좌랑·호조정랑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무장(茂長)·정천(定川)의 현감을 역임하고, 다시 내직의 통례원좌통례에 이르렀다. 그 뒤 인현왕후 민씨의 폐출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제천의 임호(林湖)로 내려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다가, 복위와 더불어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하급관원에 머물렀다. 저서로는 『절위여편(絶韋餘編)』·『중용연의(中庸演義)』·『진사통고(震史通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