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지(仁之), 호는 잠야(潛冶). 아버지는 군수 박응립(朴應立)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면서 『논어』를 탐독해 장차 대유(大儒)가 될 이상을 갖추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제천으로 피난했고, 정유재란 때는 괴산에 우거하면서 어머니의 병환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1606년(선조 39) 이조판서 허성(許筬)이 그를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천거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609년(광해군 1) 옥당(玉堂: 부제학 이하 부수찬 등 홍문관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원의 총칭)의 최현(崔晛)이 좌세마 겸 서연관(左洗馬兼書筵官)으로 천거했지만, 사양하였다.
그 뒤 정신(廷臣) 가운데 광해군의 생모에게 비호(妃號)를 올리자는 주장이 있자 호서(湖西)로 거처를 옮기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권흥(權興)·조익(趙翼) 등과 도학을 강론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왕의 부름으로 사헌부지평을 제수받았다. 박지계는 당시의 과거제도의 폐단을 논해, 주자(朱子)의 덕행과(德行科), 조광조(趙光祖)의 현량과(賢良科), 이이(李珥)의 선사법(選士法) 등이 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훌륭한 제도라고 진언하였다.
박지계는 예론에 관한 의견에서 조정의 중신들과 대립되자 잠시 남양(南陽)에 우거하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내려가 왕을 호종하였다.
수복 후 김장생(金長生)과 같이 서울로 돌아와서 양민치병(養民治兵)의 계책을 상소하였다. 또한 이이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수창(首唱: 두목이 되어 주창함)하기도 하였다. 이방숙(李芳淑)·조광선(趙光善)·김극형(金克亨)·권시(權諰)·원두추(元斗樞)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저서로는 『사서근사록의의(四書近思錄疑義)』·『주역건곤괘설(周易乾坤卦說)』 및 『잠야집(潛冶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충청남도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