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월성(月城). 초명은 박경립(朴敬立), 자는 직재(直哉)·군언(君彦), 호는 관포(灌圃). 박현룡(朴顯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환(尹瓛)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1611년(광해군 3) 병조좌랑, 1614년 대동찰방을 지냈고, 그뒤 정언·지평·수찬·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사친(私親)인 김씨를 추숭(追崇)할 때 반대상소로써 극간(極諫)하였다.
그리고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한 옥사와 1615년 인목대비유폐사건 등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조익(趙翼)이 장유(張維)에게 천거하여 벼슬길에 다시 나왔으며, 첨정(僉正)과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병으로 인하여 외직을 구하였으며, 창원부사로 임명되어서는 청렴과 덕정으로 여섯 번이나 포상이 내려졌다. 그 뒤 1629년 승지에 임명되고 경주부윤·삼척부사·도승지를 거쳐 1635년 이조참판 및 양양부사(襄陽府使)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서산에서 죽었다. 일찍이 장유·이식(李植)·정홍명(鄭弘溟) 등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 저서로는 『관포집(灌圃集)』 3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