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시집(蓬萊詩集)』에는 서·발문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편찬과 간행의 이력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제3권의 끝에 수록된 「비자기(飛字記)」를 유근(柳根)이 작성한 시기가 1625년(인조 3) 겨울이므로 간행시기는 1625년 이후가 된다. 또 조경(趙絅)이 지은 양사언의 묘갈명(墓碣銘) 기록에 “봉래 양선생의 아들이 선생의 시를 간행하여 세상에 행해진다.” 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조경이 이조좌랑으로 재직하던 1630년(인조 8)에 쓴 글이다. 따라서 『봉래시집』은 양사언의 아들 양만고(楊萬古)가 유고를 수집하고 편집하여 1626년부터 1630년 사이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3권 1책의 목판본이며, 권수제와 판심제가 모두 ‘봉래시집’이다.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 이외에 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등이 있다. 아버지는 양희수(楊希洙)이며, 어머니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유위(柳湋)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는데, 자연을 사랑하는 취미가 깊어 회양군수로 재직할 당시 금강산에 자주 들렀고,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제1권에는 「제승축산수도(題僧軸山水圖)」·「금강산(金剛山)」 등 오언절구(五言絶句) 32제(題), 「등령(登嶺)」·「서산석차왕반산(書山石次王半山)」의 육언시(六言詩) 2제, 「탄성(灘聲)」·「차나재운(次懶齋韻)」 등 칠언절구(七言絶句) 134제가 수록되었다. 제2권에는 「차육제양자화운(次六弟楊子和韻)」·「사남중옥혜궐(謝南仲玉惠蕨)」 등 오언율시(五言律詩) 40제, 「춘첩자(春帖字)」·「납천(臘天)」 등 칠언율시(七言律詩) 27제, 「차조송강형숙영설(次趙松江浻叔詠雪)」 등 오언배율(五言排律) 3제, 「차사촌운잉견회(次沙村韻仍遣懷)」 등 칠언배율(七言排律) 3제, 「증휴정(贈休靜)」 등 습유(拾遺) 13제가 수록되었다.
제3권에는 「기정팔계군(寄鄭八溪君)」 등 오언고시(五言古詩) 19제, 「식송피(食松皮)」 등 칠언고시(七言古詩) 2제, 「우녀사(牛女詞)」 등 장단구(長短句) 11제, 1540년(중종 35) 진사시 때 작성한 「단사부(丹砂賦)」 1편, 1546년(명종 1) 정시(庭試) 때 작성한 「전책(殿策)」, 중국 항주(杭州)의 지리에 대해 지은 발문인 「항주도발(杭州圖跋)」, 평양의 기자성(箕子城) 안에 있는 정자 열운정(閱雲亭)의 내력과 주변 풍광을 기록한 「열운정기(閱雲亭記)」 등 산문 8편이 수록되었다. 끝에는 1625년 유근이 지은 「비자기」가 덧붙여져 있는데, 양사언이 강원도 고성(高城)에 비래정(飛來亭)을 지은 일과 연관된 구전 설화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양사언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인 중 한 사람으로 글씨는 물론 시재(詩才)가 탁월했다. 따라서 『봉래시집』은 양사언의 다양한 시 세계를 연구할 수 있는 시문집으로써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양사언이 회양부사 시절 자주 유람했다는 금강산의 명승을 소재로 노래한 시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조선시대 기행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