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부인사의 창건시기와 사찰의 연혁은 사적기(寺跡記)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여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시기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부인사는 고려시대에 대장경의 봉안처로 유명하며, 문헌기록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 권21, 세가(世家) 권53, 행지(行志), 『고려사절요』 권14, 권53 외에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명병서(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銘幷序)와 이규보의 대장경판군신기고문(大藏經板君臣祈告文) 등을 통해서 부인사에 큰 홍수가 있었다는 사실과 부인사 승려들이 무신집권에 항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사실 외에, 부인사에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을 봉안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인사의 대장경은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제2차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이 때에 경주의 황룡사 목조9층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의 부인사지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웅전터가 남아 있고, 그 남쪽으로 석등 1기와 배례석 1기가 있으며, 대웅전 터의 서쪽에는 쌍화사석등(雙火舍石燈) 1기가 서 있다. 그리고 대웅전 터의 남쪽 좌우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동서에 배치되었다.
3층석탑의 서탑은 초층, 2층 옥개석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제 위치에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동탑은 기단석 일부만 유존해 있다. 부인사지의 남쪽에는 창건 당시에 축조한 거대한 축대가 남아 있는데, 그 길이는 동서로 55m가 되며, 높이는 3∼4m이다.
축대에 사용된 석재는 100cm×150cm 내외의 방형, 장방 석재를 치석하여 상하층이 엇물리게 한 바른층쌓기 수법으로 축조하였다. 축대의 중앙에는 남쪽향으로 낮은 대지에 연결된 계단이 마련되었고, 남쪽으로 10m 위치에는 중문지가 위치하였는데, 중문지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현재 주초석이 남아 있다.
중문지에서 정남쪽으로 진입도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진입도로의 좌측에 은통당(隱通堂)이란 글자가 음각된 팔각원당형 부도 1기와 석종형 부도 1기가 배치되었고, 남쪽으로 경판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유존해 있다.
경판고 건물지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형식에 남쪽 1칸은 건물을 받치는 원주만 서 있어서 일종의 회랑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의 주초석은 장방형 자연석을 다듬어 상면에 돌출된 원주좌(圓柱座)를 각출하여 놓았으며, 기단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면을 맞추어 놓았는데, 북쪽과 동쪽은 심하게 교란되어 있다. 담장석으로 추정되는 석열은 남쪽 축대에 접하여 시작되며, 축대에서 8m 북쪽 지점에 4매의 초석이 남아 있는데, 이곳은 대문지로 추정된다.
부인사의 남쪽 팔공산 순환도로 옆 포도밭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유존해 있는데, 현재의 상태는 지주의 하부와 지대석의 부재일부만 남아 있다. 당간지주의 중심좌는 방형 기단석상에 원형 주자를 각출시킨 상태로서 중심부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팔공산 부인사지의 사명은 고려시대의 문헌자료를 통해서 부인사(符仁寺)로 기술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부인사(夫仁寺) 혹은 부인사(夫人寺)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는데, 2차의 부인사지 발굴조사를 통해서 후자에 해당하는 명문 와편이 수습되었다.
부인사지에 대한 학술조사는 1960년대에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하여 부인사지의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는 석탑과 초석, 탑재, 석등대석 등이 소개되었다.
이후 1986년도에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종합적인 지표조사가 실시되었고, 1989년, 1991년대구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2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현재 부인사지 대웅전의 북쪽으로 200m 위치에 새로운 부인사를 조성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