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에는 대마도의 도주 소오(宗貞茂)가 조선의 요구에 따라 흥리왜선(興利倭船 : 貿易船)을 통제하고 왜구를 제어했기 때문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아들 사다모리(貞盛 : 都熊丸)의 나이가 어려 실권은 사에몬다로(左衛門太郎 : 三味多羅, 對馬島都萬戶, 早田萬戶)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과 통교한 적도 있지만, 오히려 왜구의 두목으로서 동족과 함께 도내에 일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마침 도내에 기근이 들자 이들 해적이 명나라를 침략하러 가는 도중 식량이 떨어져 조선의 연안을 약탈하게 된 것이다. 사건의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419년 5월 4일 충청도도절제사가 왜선이 결성(結城 : 지금의 홍성군 결성면)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하였다. 5일에는 전라도도절제사가 왜선 39척이 근처 섬에 정박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그런데 7일에 충청도도관찰출척사(忠淸道都觀察黜陟使) 정진(鄭津)이 보고하기를 5일 새벽 왜선 50척이 비인현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 병선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즉시 도내의 시위별패(侍衛別牌)·하번갑사(下番甲士)·수호군(守護軍) 등을 징집, 대비하게 하고, 성달생(成達生)을 경기·황해·충청도수군도처치사에, 이각(李恪)을 경기수군첨절제사에, 이사검(李思儉)을 황해도수군첨절제사에, 왕린(王麟)을 충청도도수군절제사에, 해주목사 박령(朴齡)을 겸황해도병마도절제사에 임명하였다.
또한 박은(朴訔)의 건의에 따라 항왜(降倭) 평도전(平道全)을 충청도조전병마사(忠淸道助戰兵馬使)로 삼아 반왜(伴倭) 16명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번 침입에서 왜적은 병선 7척을 불태우고 비인현을 공함(攻陷)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 싸움으로 도두음곶만호 김성길(金成吉)이 아들과 함께 전사했으며, 아군의 태반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때문에 왜구의 이번 침입으로 기해동정(己亥東征)이 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