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묘(文廟)의 동쪽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태학생으로 있을 때 국가의 변란에 처하여 정의(正義)를 주장, 국난을 극복하게 한 충의지사(忠義之士)들로서 성균관의 태학생들로 하여금 규범을 삼도록 하기 위하여 숙종 때 사우 건립을 논의, 1725년(영조 1) 12월에 완공하고 이들을 봉안하였다.
처음 숭절사(崇節祠)라 하였으나, 1764년영조가 ‘四賢祠(사현사)’라 어필로 사액하였다.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향사(享祀)하다가 6·25를 전후하여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