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집』은 고려 후기의 문인, 임춘의 시가와 산문을 엮은 시문집으로 1222년에 간행되었다. 고려시대의 문풍이 송나라 소식(蘇軾)을 따르고자 한 경향이 아주 심하였다. 임춘 역시 당시의 지배적 경향을 따랐다. 우리 문학사상 가전작품의 효시가 되는 「국순전」과 「공방전」은 술(국순전)과 돈(공방전)을 의인화하여, 국정을 담당하는 군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서하집』은 『파한집』·『동국이상국집』과 함께 무신란을 전후한 문단의 상황과 문인들의 의식 세계를 탐색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저자가 죽은 지 20여 년 뒤에 그의 지기(知己)였던 이인로(李仁老)가 유고를 수습하여 편집하고 서문을 지었는데, 이인로가 죽은 2년 뒤 1222년(고종 9)에 당시 실권자이던 최우(崔瑀)의 힘을 입어 처음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초간본은 완질로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4 · 5권 1책이 「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에 기재되어 있다.
1713년(숙종 39)에 14대손 재무(再茂)에 의해 중간되었고, 1865년(고종 2)에 후손 덕곤(德坤) 등이 목활자판으로 중간하였다. 숙종 때에 중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초간본이 인멸되어 전하지 않았는데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의 중 인담(印淡)이 꿈에 한 도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동탑(銅塔)에서 다시 찾아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또한 원래의 소장자는 담인(淡印)이었고, 후에 다시 발견한 자는 인담(印淡)이었다는 점이 기이하다고 하여 후대의 호사자(好事者)들의 입에 오르고 역대 시화집(詩話集)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6권 2책. 목판본.
권1∼3에 고율시(古律詩) 144제(題), 권4에 서(書) 18편, 권5에 서(序) 6편, 기 6편, 전(傳) 2편, 권6에 계(啓) 15편, 제문 6편이 실려 있다.
이 문집을 통하여 그의 문학세계를 살펴보면, 당시의 문풍(文風)이 송나라 문학 중에서도 특히 소식(蘇軾)을 따르고자 한 경향이 아주 심하였는데, 그 역시 당시의 지배적 경향을 형성하고 좇았음을 시문의 도처에서 언급하고 있다.
먼저 그의 산문작품의 내용을 보면, 「답박인석서( 答朴仁碩書)」 · 「상형부시랑서(上刑部侍郞書)」 · 「사상주정서기소계(謝尙州鄭書記紹啓)」 · 「상이학사계( 上李學士啓)」 등과 같은 서간과 계문(啓文)은 대체로 친구 또는 친지, 당시의 관리들에게 보내거나 회답한 것인데, 거의 모두가 자신의 불우한 형편과 비참한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도움을 청하거나 아니면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중심이 되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에서 「여조역락서(與趙亦樂書)」 · 「여담지서(與湛之書)」와 같은 글에서는 자신의 재주와 학문 그리고 포부를 피력하였는데, 그것이 매몰되고 말 처지에 놓여 있음을 비감(悲感)해하며 그 원분(寃憤)을 하소연한 것이 대부분이다.
한편 「중추회음서(中秋會飮序)」 · 「송이미수서(送李尾叟序)」 · 「일재기(逸齋記)」 · 「족암기(足庵記)」 등과 같은 서문과 기문에는 군자지도(君子之道)에 대한 그의 관점과 안분가일(安分可逸)의 추구 및 타락한 세태에 대한 비판이 나타난다.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은 우리 문학사상 가전작품의 효시가 되는데, 술(국순전)과 돈(공방전)을 의인화하여, 국정을 담당하는 군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술과 돈을 모두 신하의 입장으로 설정한 것은 작자가 추구하는 신자지도(臣者之道)를 비유적으로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술과 돈을 소재로 취한 것은 그의 죽림고회(竹林高會)에서의 음주희학(飮酒戱謔)과 경제적 궁핍과도 관련이 있다.
그의 한시는 한편 한편이 모두 불우했던 삶의 실상을 읊은 것이다. 무신란 이후 30세 후반에 요절하기까지 극한적 궁곤 속에서 신음했던 그의 목소리는 「기우인(奇友人)」 · 「동일도중(冬日途中)」 · 「차우인운(次友人韻)」 · 「모춘문앵(暮春聞鶯)」 등의 시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분 · 강개 · 감상(感傷) 등의 음울한 어조에 담겨 있다.
그의 시를 보면 절구 · 율시보다 장시(長詩)가 많고 우수한 작품도 장시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이 점은 그의 비극적 생애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이는데, 즉 가슴에 사무치는 한없는 안타까움과 비통함, 강개지심(慷慨之心)과 좌절감이 분방(奔放)하게 토로된 것이 그의 시세계의 주조(主潮)였기 때문이다. 1174년(명종 4) 그가 강남지방으로 유락(流落)하면서 쓴 시 「장검행( 杖劍行)」은 이 같은 그의 시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요컨대, 그의 문학은 난세에 처한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토로했다는 점에서 고백문학으로서 의의를 지니며, 또한 그의 문집은 현전하는 고려시대의 문집이 영성(零星)한 점을 감안하면 『파한집(破閑集)』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함께 무신란을 전후한 문단의 상황과 문인들의 의식세계를 탐색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