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설성산성 ( )

이천 설성산성 성벽
이천 설성산성 성벽
건축
유적
문화재
6세기 후반,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설성산 정상부를 둘러싸며 축조한 신라의 포곡식 석축 산성.
유적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둘레
1,095m
소재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931번지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기도
종목
시도기념물(1984년09월12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931번지
내용 요약

이천 설성산성(利川 雪城山城)은 설성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6세기 후반에 축조한 신라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성내에서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백제가 초축한 성을 신라가 개축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조사 결과 한성기 백제의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다. 축성 기법이나 성의 구조 등으로 볼 때 이 산성은 6~7세기 때 전형적인 신라 석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산성은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왕경과의 주요 교통로상에 있는 이천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다.

키워드
정의
6세기 후반,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설성산 정상부를 둘러싸며 축조한 신라의 포곡식 석축 산성.
발굴경위 및 결과

이천 설성산성(利川 雪城山城)에 대한 지표조사는 1982년과 1997년 그리고 1999년에 이루어졌다. 이후 2001년 1차 발굴 주1를 시작으로 2004년 4차 발굴 조사까지는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가 담당하였다. 2008년 5차 발굴 조사는 한백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하였으며, 2014년 6차 조사는 가경고고학연구소가 진행하였다.

1~3차 발굴 조사는 서문지를 포함한 서벽 구간과 그 안쪽의 평탄지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서문지는 이천 설성산성이 초축된 이후 신라와 고려시대에 걸쳐 주2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성내에서는 한성기 백제의 토기편과 주3 및 저장 수혈 등이 발견되었다. 4차 조사는 동문지와 주변 성벽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그 결과 동문지는 대부분 유실되었으며, 성벽은 서문지와 마찬가지로 두 차례에 걸쳐 주4한 것이 확인되었다. 5차 조사는 동문지 안쪽을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이곳에서 9~10세기의 주5 3동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6차 조사는 동문지 일대 성벽을 조사한 것으로 2014년 가경고고학연구소에 의해 진행되었다.

건립경위

이천 지역은 경주에서 충주를 거쳐 한강 유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경주에서 한강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을 차지했던 신라는 왕경이었던 경주에서 한강까지 연결되는 이천 지역을 방어하고 다스리기 위해 6세기 후반에 이천 설성산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이천 설성산성은 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신라가 축조한 이후 통일신라기에도 주6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서문지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성을 개축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이 산성은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치소 혹은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는 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와 특징

이천 설성산성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과 설성면 사이에 있는 해발 290m 설성산 정상부와 계곡부를 아우르는 주7 산성이다. 산성은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형태이며, 산성의 평면 모양은 타원형에 가깝다. 산성의 정상부에서는 이천, 여주, 죽산, 음성까지 일대 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지형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계단 형태로 기반암을 굴착한 다음 흙다짐을 하는 방식으로 성의 기저부를 조성하였다. 체성벽은 외벽만 쌓아올리는 주8뿐 아니라 외벽과 내벽을 함께 쌓아올리는 협축식(夾築式)이 모두 확인되었으며, 협축식으로 쌓은 구간이 더 많았다. 외벽은 주9으로 주10한 석재를 '품(品)'자형으로 놓으며 바른층쌓기로 올렸다. 내벽의 1~2단은 외벽과 같이 잘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지만, 위쪽으로는 거칠게 다듬은 성돌 사이로 소형 주11을 넣어 메꾸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외벽에는 체성벽을 지탱하기 위한 보축 성벽이 덧붙여졌다.

한편, 계곡부의 성벽에는 신라시대 석축 산성에서 주로 보이는 평면 형태의 사다리꼴 배수구가 설치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산성의 성문은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 성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밖에 성내에서 건물지와 집수 주12, 주13 등이 확인되었다. 성 내부에는 백제 한성기의 수혈식 주거지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또한 설성산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내려온 경사지에는 집수 주14이 마련되어 있었다. 집수 시설은 풍화 암반층을 굴착한 후 외곽은 점토로 두르고, 벽체는 할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안쪽은 점토를 채워넣은 방식으로 만든 것이 확인되었다. 저장 시설인 목곽고(木槨庫)는 산의 사면에 위치하며, 풍화 암반층을 굴착한 다음 바닥면을 고운 점토로 깔고 '목(目)'자 형태의 주15을 배치하여 만들었다.

의의 및 평가

이천 설성산성은 성내에서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백제가 초축한 성을 신라가 개축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한성기 백제의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을 쌓은 축성 기법이나 성의 구조 등으로 볼 때 이천 설성산성은 6~7세기대 전형적인 신라 석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경주에서 충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주요한 교통로에 있는 이천 지역을 방어하고 다스리기 위해 6세기 후반에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가경고고학연구소, 『이천 설성산성』(2015)
한백문화재연구원, 『이천 설성산성-5차 발굴조사 보고서-』(2010)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이천 설성산성 4차 발굴조사 보고서』(2006)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이천 설성산성 2·3차 발굴조사 보고서』(2004)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이천 설성산성 1차 발굴조사 보고서』(2002)
주석
주1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파내서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조사. 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찾아 밝혀내기 위해 하는 조사. 우리말샘

주2

집이나 축조물 따위가 허물어지거나 낡아서 새로 짓거나 고쳐 쌓음. 우리말샘

주3

집이 있거나 있었거나, 집을 지을 자리. 우리말샘

주4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 우리말샘

주5

어떤 건물이 있던 터. 우리말샘

주6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성. 우리말샘

주7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 우리말샘

주8

편축식

주9

내각(內角)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 주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0

돌을 다듬음. 우리말샘

주11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주12

마시기에 적합한 수질과 풍부한 유량을 갖춘 물 공급원에서 끌어온 물을 모아 두는 데 필요한 시설. 우리말샘

주13

나무로 만든 저장 시설. 우리말샘

주14

5x3x0.8~1.2m

주15

5.1x4.1m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양시은(충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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