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4.3m. 승안사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 “승안사는 사암산(蛇巖山)에 있다”고 하였을 뿐 다른 기록은 없으며, 일찍이 폐사된 듯하다. 석탑은 주변에 재실을 건립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받침돌과 몸돌에 여러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아래층 받침돌은 너비가 비교적 좁은 편으로, 하나의 돌에 바닥돌·면석·덮개돌을 깎아 만든 돌 4장을 조립하여 만들었다. 덮개돌 윗면에는 1단의 굄을 새겨 윗층 받침돌을 받치게 하였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각 면마다 1장의 널돌을 4면에 {{#061}} 모양으로 세워 조성하였다.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조각하여 좌우 2부분으로 나누었는데, 8부분으로 나뉜 면에는 면 마다 1구씩 모두 8구의 불상·보살상·비천상(飛天像) 등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덮개돌은 넓고 커서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과 거의 같은 규모인데,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없는 것과 윗면에 꽃잎이 아래로 향한 큼직한 14개의 연꽃 무늬를 새긴 것은 이 석탑의 특이한 모습이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제작하여 올렸다. 2층부터는 높이가 크게 줄어 2층과 3층의 높이가 거의 비슷하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1층 몸돌에는 각 면마다 1구씩 모두 4구의 사천왕상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서 너비가 넓은 편이다. 수평인 처마의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이 있고, 윗면인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지만 전각(轉角)의 반전은 뚜렷하지 않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만 남아 있다. 노반에는 모서리 기둥과 덮개돌이 새겨져 있고, 복발은 2줄의 띠를 두른 편구형(偏球形)이며, 앙화의 윗부분은 크게 파손된 상태이다.
이 석탑은 대체로 신라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받침 부분과 탑신 부분의 균형이 깨져 보인다. 특히 받침 부분의 결구(結構)가 간략화된 반면 장식의 비중이 커진 고려 초기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962년에 석탑을 다시 서남쪽으로 약 15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기기 위해서 해체하였는데, 이 때 1층 몸돌의 윗면에서 지름 12㎝, 깊이 16㎝ 크기의 사리 구멍과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곧 사리 구멍에서는 한지(韓紙)에 적은 홍치7년명(弘治七年銘) 묵서(墨書)와 함께 청색 면포보(棉布褓) 1개, 백색 면포 조각 하나, 주(朱)·자(紫)·황(黃) 등의 여러 색 명주 조각 약간과 주머니 하나, 황동제합(黃銅製盒) 안에 든 향(香) 조각, 높이 4.7㎝의 비취색 유리제 사리병(舍利甁), 유리구슬 1줄, 은가락지 7개, 은 조각 1점 등이 확인되었다. 이 장엄구는 1494년(성종 25)에 석탑을 옮겨 세웠을 때 안치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