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인종(仁宗) 때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어사잡단(御史雜端)에 이르렀으며, 청렴 · 충직하기로 이름이 났다. 의종(毅宗) 초 시어사(侍御史) 송청(宋淸)과 함께 합문(閤門)에 엎드려 3일 동안 시사(時事)를 논하였으나 회보(回報)가 없으므로 병을 구실로 사직하였다.
1152년(예종 6)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 내시(內侍) 윤언문(尹言文)이 괴석(怪石)을 모아 수창궁(壽昌宮) 북원(北園)에 가산(假山)을 쌓고 그 곁에 정자를 지어 사치가 심하였다. 이에 급사중(給事中) 임경(壬儆)과 더불어 소(疎)를 올려 윤언문 등을 파직시키기를 간하였다.
1158년(의종 12)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올라 평장사(平章事) 최윤의(崔允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김영부(金永夫)와 더불어 상춘정(賞春亭)에 나아가 성신(星辰)에 제사지내고 비가 오기를 빌었다. 같은 해 6월 왕이 환관(宦官) 정함(鄭函)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하므로 간의대부 김양(金讓) · 유공재(柳公材), 중서사인(中書舍人) 홍원척(洪源滌), 기거사인(起居舍人) 김우번(金于蕃), 좌정언(左正言) 허세수(許勢修) 등과 함께 소를 올려 이를 부당하다고 간하였으나 회보가 없으므로 홀로 대궐에 들어가 다시 간하자, 이에 왕이 정함의 벼슬을 깎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탄핵한 일을 미워하여 수사공상서우복야(守司空尙書右僕射)로 좌천(左遷)시키니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다시 소환되었다가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치사(致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