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익창(吳益昌)은 1557년(명종 12) 전라남도 영광군 효곡(孝谷)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유원(裕遠), 호는 사호(沙湖)이다. 참판 오치선(吳致善)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진사 오인(吳寅)이다. 1579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신원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1597년 명량해전 당시 통제사 이순신이 전선 12척만 거느린 것을 본 전라도 연해민들이 피란길에 올랐으나, 이들을 설득하여 피란선을 동원하여 수군의 후방을 지원하였다. 또한, 의복과 군량을 공급하는 한편, 솜이불을 모아 물에 적셔 배에 펼쳐 철환을 막게 하였다.
광해군 대 1613년 임해군 역모 사건을 평정한 공로로 익사(翼社)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참록되었다. 이이첨의 실정에 회의를 품었고, 공조정랑에 있던 오익창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심원동(深源洞)에 기거하며 시를 짓고 교육에 힘썼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란하자, 도내에 격문을 보내 식량을 모아 강화도로 운반하였다.
1613년 익사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1713년 무장 탁곡면(托谷面)에 죽산사(竹山祠,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성산리)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