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용아(龍兒)박용철의 생가로 그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 건립연대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맨 왼쪽은 부엌으로 전면에는 부엌방을 두었으며, 중앙 2칸은 방으로 4분합문을 달았고 나머지 2칸은 2짝 여닫이의 井자살문이다. 창호는 걸쇠를 걸어 들어 열 수 있는 들어열개의 구조로 되어 있다. 2자 높이로 자연석을 바른층 쌓기한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전면은 두리기둥을 세우고 측면과 내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주두 위에 납도리를 올려 5량 구조를 만들었다. 서까래 위에 부연을 얹은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랑채도 5칸집으로 우측으로부터 부엌, 방, 방, 마루의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그 외에 사당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인 맞배집이며 서재는 원래 초가집이던 것을 시멘트 기와로 이었다. 행랑채는 4칸집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다.
용아의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몸채의 초가 지붕을 시멘트 기와로 교체하고 부속 건물은 슬레이트로 개량했었으나 최근에 다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우리나라 현대문학 기수의 한사람으로 초기 시단을 빛낸 용아를 기리기 위하여 그 생가 일단을 지방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용아의 본명은 박용철이며 1904년 이곳에서 태어나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 청산학원(靑山學院), 동경외국어대 독문과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고교시절부터(1918) 지하신문 《목탁》을 발간하여 항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고, 1922년 동경 청산학원 4학년에 편입, 1923년 김영랑(金永郎)과 접목되었으며 일본 유학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운 한국 유학생들을 돌보았고 자비로 《월간문예 月刊文藝》, 《시문학 詩文學》, 《문학 文學》 등의 잡지를 간행하였다. 1923년 9월에 귀국하여 당시 강진에 묻혀있는 김영랑과 본격적으로 왕래하면서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하여 외국어 문학을 소개하는 한편 1931년에는 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을 발간하면서 시문학파 시인으로 이름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다시 《시원 詩苑》을 발간하였으며 1937년 《청색지 靑色紙》라는 순수문학 잡지를 간행하였다. 이 무렵의 조선 문단은 이른바 프로레타리아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온 때였으나 용아는 이 고장의 김영랑 등과 어울려 순수시 운동에 몸을 바쳐 30년대의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용아는 아깝게도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여 더 이상의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