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강(士强). 이몽량(李夢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항복(李恒福)이다. 아버지는 부사 이정남(李井男)이며, 어머니는 윤두(尹頭)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등을 지냈으며, 1652년(효종 3) 정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5년 정언에 제수되고, 이어 사서·헌납·필선·부수찬·부교리·보덕·사간·교리 등을 역임하고, 1659년(현종 즉위) 사은정사(謝恩正使) 홍득기(洪得箕)와 같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선천부사와 의주부윤을 지내고, 이어 형조참의·부승지·대사간, 호조·병조·이조의 참의·승지를 거쳐 1668년에 철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1669년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이어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671년 12월 병을 얻어 성남(城南)의 사제에서 죽었다. 의주부윤으로 재임 중에는 문묘를 증수하고 매월 삭망예를 올렸으며, 수재들을 향교에 모아 학문에 정려하도록 힘썼다. 그러나 민간인들 가운데 월경범법자(越境犯法者)가 나타나 청나라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책임관장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조정에서는 왕의 특지로 영상 정태화(鄭太和), 형조판서 허적(許積) 등이 직접 청사(淸使)에게 양해를 구하였으며 가족친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는데, 이시술은 오직 “사생은 하늘이 정하는 바에 따를 뿐 인력으로 좌우할 수 없다.”고 평소와 조금도 다름 없는 태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