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군실(君實). 할아버지는 정사공신(靖社功臣) 한천군 이의배(韓川君 李義培)이며, 아버지는 이목(李穆)이다. 어머니는 연안 김씨(延安金氏)로 현령 김희온(金希溫)의 딸이다.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한 뒤 비변사낭관·도총부도사·경력을 거쳐, 1653년 숙천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1654년 만포첨사, 이듬해 영흥부사를 거쳐 그 뒤 장단방어사·충청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회령부사에 제수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다. 회령은 북방의 거진(巨鎭: 진관체제에서 절제사·첨절제사가 있는 진. 중요한 군사 거점지로서 주변의 諸鎭을 통할했음)으로서 야인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는데, 그들의 왕래에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아 피해가 많았다.
이 때 이여발이 부임해 출입 인원을 320명 이내로, 체류 일수를 20일 이내로 규정하는 등 엄격한 통제를 가해 많은 피해를 덜었다. 1660년(현종 1) 삼도통제사에 이어 함경도병마절도사·훈련도정·포도대장, 공조·병조의 참판 등을 지내고,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서는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정비하며 군사들에게 사예(射藝)를 훈련시켜 북방 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 뒤 훈련대장 이완(李浣)이 면직되자 상국(相國) 정태화(鄭太和)의 천거로 후임이 되었으며, 이어 어영대장, 한성부의 좌윤·우윤·비변사제조·포도대장·총융사·수원부사 등을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과묵해 웃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한다. 하지만 사졸을 따뜻이 위무하고 여러 장교들에게 예의로 대했으므로 덕을 우러러 이여발에게 충실했다 한다. 정태화·여성재(呂聖齋) 등과 가까이 지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