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규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민종식 의진에서 참모사로 활동하였으며, 국권 피탈 이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한 의병 · 독립운동가.
이칭
성식(聖式)
춘당(春塘)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9년(철종 10)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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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때, 민종식 의진에서 참모사로 활동하였으며, 국권 피탈 이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한 의병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성식(聖式), 호는 춘당(春塘). 이은직(李殷稙)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6년 매부인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민종식의병대가 홍주를 점령할 때 참모사(參謀士)로서 활약하였다.

그 해 5월 31일 홍주성 공방전에서 의병진이 무너진 뒤 탈출하여 변장하고 다니다가, 7월에는 청양에서 군사를 수습하여 400명의 병력으로 부여·노성을 지나 연산에 이르러 왜병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였다.

그 뒤 예산지방을 중심으로 재거를 계획하던 중 10월 2일 일진회원의 밀고로 잡혀 평리원재판소(平理院裁判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07년 5월에 감형되어 6월 지도(智島)에 정배되었다가 11월에 풀려났다.

1909년 8월 청양 추치(抽峙)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하고, 1911년 10월에 옥천에서 전 승지 노병직(盧秉稷)·전 참의 장남기(張南基)·송순태(宋舜台)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 밀고로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欲知島)로 유배되었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大義士)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잡혔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1(국가보훈처, 1986)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민족문화협회, 1980)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경성지방법원판결문(京城地方法院判決文)」
집필자
이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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