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성식(聖式), 호는 춘당(春塘). 이은직(李殷稙)의 아들이다.
1906년 매부인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민종식의병대가 홍주를 점령할 때 참모사(參謀士)로서 활약하였다.
그 해 5월 31일 홍주성 공방전에서 의병진이 무너진 뒤 탈출하여 변장하고 다니다가, 7월에는 청양에서 군사를 수습하여 400명의 병력으로 부여·노성을 지나 연산에 이르러 왜병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였다.
그 뒤 예산지방을 중심으로 재거를 계획하던 중 10월 2일 일진회원의 밀고로 잡혀 평리원재판소(平理院裁判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07년 5월에 감형되어 6월 지도(智島)에 정배되었다가 11월에 풀려났다.
1909년 8월 청양 추치(抽峙)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하고, 1911년 10월에 옥천에서 전 승지 노병직(盧秉稷)·전 참의 장남기(張南基)·송순태(宋舜台)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 밀고로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欲知島)로 유배되었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大義士)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잡혔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