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정안(定安). 자는 충공(忠恭). 상서공부원외랑(尙書工部員外郎) 임호(任顥)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당시 태자로 있던 선종의 추천으로 전첨(典籤)이 되고, 선종이 즉위하자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우승선까지 올랐다.
1095년(헌종 1) 헌종의 즉위를 고하러 요나라에 다녀왔고, 숙종 초에 사감이 있던 환관에게 여러 번 참소당했으나 왕의 신임으로 무사하였다.
1100년(숙종 5) 송나라의 철종이 죽자 조문 사절로 송나라에 갔을 때, 일행은 모두 재물을 탐했으나 홀로 청렴하며 부지런하고 진실해 중국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듬해 돌아오면서 황제가 하사한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을 가지고 와, 그 공으로 작위를 받고 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제수되었다.
1104년 동지추밀원사로 승진해 재상의 서열에 오르고, 이듬해 추밀원사 이부상서(樞密院使吏部尙書)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겸하고 이어 평장사(平章事)에 승진되었다.
1109년(예종 4)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등과 함께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을 공격해 윤관이 물러나 있는 동안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으며, 윤관이 쌓은 9성의 뒷마무리를 맡아 처리하였다.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致仕)하였다.
학문이 뛰어나 사관과 한림원을 역임했고, 지공거(知貢擧)를 거쳤다. 세 아들 임원숙(任元淑)·임원후(任元厚)·임원준(任元濬)이 모두 재상 또는 수상의 지위에 올라 고려 전기의 대표적 명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으니, 임의는 정안임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다.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경(貞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