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준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 추밀원사 · 참지정사 · 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재상.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147년(의종 1)
본관
정안(定安)
주요 관직
추밀원사, 평장사
관련 사건
한안인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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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임원준은 고려 전기에 추밀원사, 참지정사, 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재상이다. 본관은 정안이고 예종 때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임의의 아들이다. 추밀원사, 참지정사, 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1122년(예종 17) 한안인의 당여로 지목되어 유배당하기도 하였으며, 1132년(인종 10)에는 어사대부로 과거의 시제에 잘못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평장사로 치사하였다가 1147년(의종 1) 사망하였다.

정의
고려 전기, 추밀원사 · 참지정사 · 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재상.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정안(定安: 현, 전라남도 장흥군). 예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임의(任懿)의 아들이다. 형 임원숙(任元淑)과 임원후(任元厚, 任元敳)도 각각 평장사와 문하시중이 되어 삼형제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주요 활동

문음(門蔭)주1으로 출사한 듯하다. 1121년(예종 16) 좌정언(左正言)으로서 당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홍재(崔弘宰)가 사사로이 군사들을 부려 개국사(開國寺)에 대장당(大藏堂)을 지을 목재를 운반하게 한 것을 탄핵하였다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그 뒤 원외랑(員外郎)이 되어서는 1122년(예종 17) 한안인(韓安仁) 일파가 제거될 때 한안인의 주2로 지목되어 유배당하였다. 1130년(인종 8)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서 현실 치의 폐단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 등과 상소하였으나, 인종(仁宗)은 2, 3가지만 받아들였다.

1132년(인종 10) 어사대부(御史大夫)로, 그해에 실시된 과거의 시제(試題)가 잘못되었음을 들어 급제자의 명패를 빼앗고 다시 시험을 치를 것을 주장하였으나 인종이 받아들이지 않자, 어사대(御史臺)의 관원들을 이끌고 대죄(待罪)하여 어사대가 7일 동안 빈 적도 있었다.

다음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어 재추(宰樞)의 반열에 들었으며, 곧 이부상서 지추밀원사(吏部尙書知樞密院事)를 거쳐 1135년(인종 13) 추밀원사가 되었다. 다음 해에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르고, 1137년(인종 15)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를 더하였으며, 이후 평장사(平章事)로 주3.

1147년(의종 1) 8월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논문

박용운, 「고려시대의 정안임씨·철원최씨·공암허씨가문분석」 (『한국사논총』 3, 성신여자사범대학 국사교육학회, 1978)
주석
주1

고려ㆍ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ㆍ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우리말샘

주2

사위의 아버지와 사위 상호 간, 곧 동서를 아울러 이르는 말. 사위의 아버지를 ‘인(姻)’이라고 하고 사위끼리를 ‘아(婭)’라고 한다. 우리말샘

주3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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