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정안(定安: 현, 전라남도 장흥군). 예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임의(任懿)의 아들이다. 형 임원숙(任元淑)과 임원후(任元厚, 任元敳)도 각각 평장사와 문하시중이 되어 삼형제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문음(門蔭)주1으로 출사한 듯하다. 1121년(예종 16) 좌정언(左正言)으로서 당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홍재(崔弘宰)가 사사로이 군사들을 부려 개국사(開國寺)에 대장당(大藏堂)을 지을 목재를 운반하게 한 것을 탄핵하였다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그 뒤 원외랑(員外郎)이 되어서는 1122년(예종 17) 한안인(韓安仁) 일파가 제거될 때 한안인의 주2로 지목되어 유배당하였다. 1130년(인종 8)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서 현실 치의 폐단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 등과 상소하였으나, 인종(仁宗)은 2, 3가지만 받아들였다.
1132년(인종 10) 어사대부(御史大夫)로, 그해에 실시된 과거의 시제(試題)가 잘못되었음을 들어 급제자의 명패를 빼앗고 다시 시험을 치를 것을 주장하였으나 인종이 받아들이지 않자, 어사대(御史臺)의 관원들을 이끌고 대죄(待罪)하여 어사대가 7일 동안 빈 적도 있었다.
다음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어 재추(宰樞)의 반열에 들었으며, 곧 이부상서 지추밀원사(吏部尙書知樞密院事)를 거쳐 1135년(인종 13) 추밀원사가 되었다. 다음 해에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르고, 1137년(인종 15)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를 더하였으며, 이후 평장사(平章事)로 주3.
1147년(의종 1) 8월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