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장암정은 장암 대동계(大同契)에서 1668년(현종 9)에 동약(洞約)의 모임 장소로 지은 정자이다. 동약이란 조선시대 시골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규칙으로 좋은 일은 서로 권유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 잡아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때로는 향음주례(鄕飮酒禮) · 백일장(白日場) · 회갑연(回甲宴)을 비롯하여 국경일(國慶日) · 국왕(國王)의 승하(昇遐)시(時) 예상소(禮上所)로도 이용되었다.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향약(鄕約) 집회소로서, 장암 대동계가 창설된 이듬해인 1668년(현종 9)에 창건되었다. 동계(洞契)의 규모로 보아 현재와 같은 완전한 규모는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중수기(重修記)」나 『대동계책(大同契冊)』을 살펴볼 때 계가 크게 왕성해진 1760년(영조 36)에 현재와 같은 규모로 다시 중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788년(정조 12)과 1819년(순조 19)에 각각 중수하였고, 1880년(고종 17)에 다시 중창하였다. 1899년 기와 공사, 1964년 난간 보수, 1967년 계단 수리가 이루어졌다. 1976년 기와공사가 있었으며, 1997년에 한 차례 수리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고직사(庫直舍)와 강신소(講信所)가 있다.
장암정 내부에는 「장암정기」 · 「장암정중수기」와 각종 시문(詩文) 등 약 24개의 현판(懸板)이 보관되어 있는데, 장암정의 현판은 창건 당시 명필인 김이도(金履道)의 친필이라 전한다. 장암정의 배치는 마을 앞의 소로변과 바로 인접하여 평탄한 대지 위에 병좌임향(丙坐壬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장암정은 앞면 4칸, 옆면 3칸 규모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 집이다. 앞쪽은 3척 정도의 비교적 높은 높이로 마루를 깔아 개방된 구조이며 뒤쪽 중앙으로 마루방 2칸을 두었다. 전면의 마루는 통간으로 하고 중앙 후부 2칸은 마루방을 놓은 유실형(有室形)이며, 방의 상부에는 누다락을 설치하여 서고(書庫)로 이용하였다. 후면과 일부 좌우 측면 1칸을 판문을 달아 부분 폐쇄하였으며, 1967년 목조계단을 설치하여 마루에 오르도록 하였다.
구조는 단층 목가구조로서 평탄한 대지 위에 낮은 막돌쌓기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주두(柱頭 : 대접받침) 밑에 창방을 지르고, 쇠서[牛舌]에 연화각(蓮花刻)을 얹은 무출목(無出目) 초익공(初翼工)을 창방(昌枋)에 직교 짜임하고, 내부의 보아지는 비스듬히 절단하여 간결하게 결구하고 있다.
또한 창방과 처마도리의 장여 사이 주심(柱心) 위에는 행공첨차(行工檐遮)를 설치하고, 주간(柱間)에는 태극 · 귀면(鬼面) · 식물 문양이 조각된 화반(花盤 : 주심도리 밑 장여를 받는 초새김한 받침)을 설치하였다. 좌우 측면과 후면에는 마루에 머름을 설치하고 판문을 달았으며, 전면 창호는 띠살창이다.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지붕은 선자연(扇子椽) 겹처마로서 팔작지붕을 유지하고 있다.
가구 형식은 전후 평주 위와 내진고주(內陣高柱)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짧은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를 세워 종보[宗樑]를 얹었으며, 원형의 판대공(板臺工)에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고주(高柱)에 걸친 보 밑에는 비스듬히 절단한 보아지를 두고 있다. 협간에는 충량(衝樑)이 고주에 걸쳐지고, 외기(外機)중도리에는 외기반자를 두고 있다. 특히 정자로서는 드물게 단청을 하였는데 상부는 청색으로, 하부 기둥과 판벽은 적색으로 하였다.
장암정은 건축적으로 큰 특징은 없으나, 동약의 집회소로 사용되었던 드문 예이자 남겨진 유물이 지방의 실정과 특색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어 조선후기 호남 향촌사회의 생활사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한편, 장암정에 소장되어 있는 동약자료는 17∼20세기의 생활기록으로서 ‘조선후기 호남지방 향촌사회의 생활사’를 반영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로, 2019년 11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 '영암 장암정 대동계 문서(靈巖 場巖亭 大同契 文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