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 묘 출토복식(長興任氏 墓 出土服飾)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였던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장군의 조카며느리인 장흥임씨로 추정되는 묘에서 출토된 23점의 유물이다. 17세기 전반기로 추정되는 저고리 2점, 바지 2점, 철릭 1점, 직령포 1점과 염습 제구 17점이 출토되었다. 1980년에 '장흥임씨의복'이라는 명칭으로 의복 6점이 중요민속자료(제112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에는 염습 제구 17점을 추가로 지정하면서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長興任氏 墓 出土服飾)은 1971년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장흥임씨라고 알려진 여자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총 23점의 유물이다. 장흥임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였던 김덕령 장군의 동생 덕보(德普)의 며느리로, 남편은 휘(諱)가 거취(璩醉), 자(字)가 휴서(休瑞)로 1593년생이라 한다. 관 속에서 철릭 1점, 두루마기형 누비포 1점, 저고리 2점, 바지 2점 등 의복류 6점과 멱건 1점, 멱목 1점, 소매 2점, 교포 8점, 솜이불 1점, 솜버선 2점(1쌍), 미투리 2점(1쌍)의 염습 제구 17점이 출토되었다. 묘주의 생존 시기는 그간 축적된 선행 연구를 통해 철릭의 주름 양식과 소매 형태를 보았을 때 17세기 전반기로 추정 가능하다.
1980년 4월 1일에 '장흥임씨의복'이라는 명칭으로 의복 6점이 중요민속자료(제112호)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관계 전문가가 추가 지정 조사를 실시하여 지정 명칭 변경과 세부 유물 명칭을 정정하고 2004년 9월 25일 염습 제구 7종 l7점을 추가로 지정하면서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은 철릭과 칼깃형 저고리, 사폭 바지 등으로 모두 남성 의복이 출토되어 묘주의 실제에 대해 재고의 여지가 있는 사례이다.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은 모두 6점이다.
철릭[帖裡]은 1점 출토되었다. 철릭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따로 구성하여 허리에서 주름잡아 연결시킨 형태의 포다. 백관이 융복(戎服)이나 관복의 받침옷, 혹은 일상적인 겉옷으로 착용하였다. 장흥임씨 묘 출토 철릭은 무명으로 만든 홑 철릭이다. 깃 모양은 칼깃형이며, 소매는 왼쪽 소매 탈착식으로 되어 있으며, 모양은 진동에서 사선으로 내려오다가 완만하게 일자로 뻗은 형태로 전형적인 17세기 전반기 양식이다. 옷 크기는 길이 127(上48.5, 下78.5)cm, 화장 117cm, 품 50cm이다. 상하 비율이 1:1.61이고 허리 주름이 1.5cm 내외로 넓게 잡혀 있는 등 전체적으로 17세기 양식이다.
두루마기형 누비포 1점은 겉깃이 칼깃이고, 옆이 막혀 있는 두루마기형 포인데, 겉감은 삭아서 없어졌으며 무명 안감이 겉으로 뒤집혀서 보관되어 있었다. 깃모양과 옆선의 형태로 보아 남성용으로 추정되는 옷이다. 크기는 길이 117㎝, 화장 122㎝, 뒤품 54㎝이며, 4~4.5㎝ 간격으로 누빈 흔적이 남아 있다.
저고리는 2점으로, 모두 별다른 장식성이 없고 겉깃 모양이 칼깃형의 남성용 저고리 형태를 하고 있다. 무명으로 만든 솜저고리와 홑적삼이 있다. 솜저고리는 출토 당시부터 옷감을 덧대어 기운 부분이 많이 있어 실제로 입었던 옷임을 확인 시켜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뒷길이 72cm, 화장 95cm, 뒷품 52cm의 크기이다. 홑적삼으로 옆선 아래쪽에 트임을 주었으며 전체적인 크기가 솜저고리보다 작다.
바지는 사폭 바지 2점이 출토되었다. 사폭 바지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형적인 남성용 바지이다. 솜옷과 홑옷이며, 모두 무명으로 만들었다. 솜바지는 길이 83.5cm로 전체적으로 크기가 홑바지보다 큰 편이다. 바지 2점 모두 중앙에 맞주름을 잡아 허리말기를 달아준 방식이 특이한데 임진왜란 시기까지 입었던 단속곳형 바지에서 완전한 사폭 바지 형태로 변화되는 과도기의 형태로 추정된다.
염습 제구는 7종 l7점이 출토되었다. 종류는 멱건, 멱목, 소매 2점, 교포 8점, 솜이불 1점, 솜버선 2점(1쌍), 미투리 2점(1쌍)이다. 이 가운데 머리를 싸준 멱건의 경우, 머리에 쓰는 모자 형태와 달리 앞이 짧고 뒤가 긴 직사각 형태의 건(巾) 형태이다. 미투리는 바닥이 2날로 되어있으며, 소매 2점은 남성용 포의 소매 형태를 하고 있다.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은 문화재 지정 당시 1500년대 후반기로 연대 추정을 하였고, 후손의 증언으로만 묘주를 장흥임씨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의 출토 사례와 학술 성과로 묘주의 생존 시기와 묘주 실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첫째,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의 연대가 1600년대 전반기로 추정되는 점이다.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에서 시대 추정이 가능한 부분은 철릭의 상의보다 하의가 길게 되어 있으며 허리선은 넓은 간격으로 주름이 잡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매 형태는 길이가 길고 진동에서 사선형으로 커지다가 완만한 일자형으로 이어지다가 소매 끝 모서리가 둥글게 된 모양이다. 특히 소매 형태는 성급(成汲, 15531621), 이응해(李應獬, 15471626), 김확(金矱, 15721653), 신경유(申景裕, 15811633) 등 17세기 전반기 분묘 출토품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 소매 형태인데, 1600년대 중반기에는 이 보다 소매 폭이 넓어지고 1600년대 후반에 광수(廣袖)의 두리 소매 형태로 변화된다. 따라서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은 17세기 전반기 시기의 것으로 추정 가능한 것이다.
둘째, 철릭, 칼깃형 저고리, 사폭 바지 등 모두 남성 복식으로 특정되는 의복이 출토되어 실제 묘주의 성별과 묘주의 실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여전히 장흥임씨의 복식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17세기 전기에 전란(戰亂)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복 풍습이 나타난 장속(葬俗)과 여성용 칼깃 저고리 착장설 등에 근거한다. 그러나 출토 당시의 염습 상태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출토 사례 중에서 17세기 전기의 여성 분묘에서 출토된 칼깃 저고리의 형태는 깃, 끝동, 섶 등이 색의 변화를 주었고 옆선에 무를 장식한 특징이 있기 때문에 장식성이 없는 남성용 칼깃 저고리와는 차이를 보인다.
이상과 같이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 사례는 여전히 묘주의 실제를 특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등 해결되지 못한 문제점을 수반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