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

경제
개념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가 구성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재화를 획득 · 관리 · 사용하는 공공경제를 가리키는 경제용어. 공공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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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재정은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가 구성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재화를 획득·관리·사용하는 공공경제를 가리키는 경제용어이다. 사회의 유지·발전에는 재화와 용역이 필요하며 그 조달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 우리의 전통 조세제도는 조[토지세]·용[부역 의무]·조[호구세]의 조세체계를 기본으로 했는데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적인 재정제도 기틀이 마련되었다. 재정운영이 실물형태에서 화폐로 전환되었고 은행이 설립되었으며 새로운 은본위제도가 채택되었다. 현재는 의회주의를 채택하여 국가재정에 관한 최고의 의사결정을 국회가 행사한다.

정의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가 구성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재화를 획득 · 관리 · 사용하는 공공경제를 가리키는 경제용어. 공공경제.
개설

의의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가 어떠한 형태로 발생하여 조직되었느냐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그 존재 자체는 오늘날 인류가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근대사회에 있어서 이들을 유지 · 발전시키는 것이 공동생활의 기본목표가 되고 있다. 왜냐햐면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의 기능은 그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고 단체원의 경제적 후생복지를 증진시키며 문화의 향상을 도모하는 데 있으므로, 이 직능은 단체원칙에서 보면 공동으로 기대되는 원망(願望), 즉 공동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는 이와 같은 공동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재화와 용역을 필요로 한다. 재화와 용역을 획득하는 방법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고대사회에서는 개인이 임의로 공공단체에 재화나 용역을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써 획득되었다. 봉건제도하에서는 토지가 국왕에 의하여 지배되었기 때문에 계약에 의하여 필요한 재화나 용역이 조달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사유재산제도가 도입되고부터는 국가 등이 필요로 하는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에 의하여 조세라는 형태로서 강제징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가 공동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재화를 획득하고 이것을 사용함으로써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재화를 획득하고 관리 · 운영함에 있어서는 일정한 원칙과 규정이 필요하다.

국민경제가 변천하고 혹은 국가 등의 통치형태가 변화하면 재정현상도 자연히 변화되기 마련이다. 자연경제시대에는 국가 등의 공공단체가 직접 필요로 하는 재화를 실물로서 획득하여 사용하였고, 화폐경제시대에는 재화의 획득은 화폐로서 매개되었다. 현재는 화폐를 기초로 한 신용경제시대이므로 현대의 재정은 국가 등의 공공단체가 직능을 수행하기에 필요한 화폐의 획득 · 관리 · 사용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재정은 ‘재(財)’라는 면에서 본다면 국가 등의 공공경비의 지출과 이의 수입조달을 위한 화폐의 강제징수와 화폐채무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의 면의 재정은 정부활동 중 화폐를 가지고 측정할 수 있는 측면이다. 그러므로 재정은 화폐의 유동성, 자본시장 등과 같은 금융면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며 근년에 와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재정을 ‘정(政)’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정부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경비와 이를 위한 수입조달과정 중 정부활동이란 정책적인 것이 기본문제이다. 정의 면은 재의 면인 금융의 문제가 아니고 자원배분, 소득재분배, 완전고용 내지 완전이용, 물가수준의 안정, 경제성장의 문제 등 경제정책 등의 문제가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정이라 하면 재와 정의 두 면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야 한다.

재정의 특징

가계 · 기업 · 국가 및 기타 지방공공단체 등의 개별경제를 총합한 것을 국민경제라 한다. 재정은 공공정치단체인 국가 등을 주체로 한 개별경제이므로 공공개별경제이며, 국민경제 가운데 공공경제 혹은 공공부문을 구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일반 민간의 가계나 기업은 주체가 사적인 것이므로 사적 개별경제이며, 사적 부문 혹은 시장창구를 통하여 그것이 유지 운영되는 것이므로 시장경제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공공주체인 재정이 시장경제의 주체인 가계나 기업과 구별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장경제의 경제 주체인 가계나 기업의 경제적 행동원리는 가계에 있어서는 효용의 극대화이고 기업에 있어서는 이윤의 극대화에 있는 데 비하여, 공공경제인 재정은 사회적 가치의 극대화를 의도하는 데 있다.

둘째, 국가 등의 공공단체는 가계나 기업에 공공재와 공공용역을 제공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서 조세를 징수한다. 이러한 교환조건은 시장경제에 있어서의 재화 및 용역의 교환조건과는 아주 다르다.

시장경제 영역에 개별경제의 참가는 권력적 · 강제적인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등가교환은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경제는 합의원칙에 입각하고 공공경제는 강제원칙에 입각하여 교환이 이룩된다.

셋째, 공공경제의 활동은 민간경제로서 실행하기 어려운 부문에 의도적으로 참여하는데, 특히 개발도상국가에 있어서는 민간경제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넷째, 공공경제와 민간경제는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관련의 형태는 서로 다르다. 민간경제는 상호간 평면적으로 대등한 등가관계에서 수평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데 대하여, 공공경제인 재정은 사적인 개별경제를 입체적으로 수직적인 관련에서 성립되고 있다. 민간경제는 각 경제 주체가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나 공공경제인 재정은 민간경제에 의존하고 있다.

다섯째, 국가나 지방공공단체의 재정활동은 국가 등의 존속이 영구성을 가진다는 전제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국가가 ‘영구공채’를 발행하는 것도 국가의 영구존속성을 전제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여섯째, 공공경제의 활동목적은 공공의 안녕질서의 유지와 확보, 국민의 경제적 · 문화적 복지후생 향상 등에 있으므로 금전적으로 평가할 수가 없다. 다만, 후일에 가서 국가 내외에 대한 정책의 결과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였느냐, 즉 국민의 희생에 상응하였느냐의 판단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경제의 목적은 재화의 생산과 획득으로 이득을 얻으려는 데 있으므로 금전적으로 평가할 수가 있다. 즉, 시장경제는 급부와 반대급부를 비교할 수 있으나, 공공경제인 재정은 국가의 각종 급부에 대하여 국민의 각종 반대급부를 생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공공경제인 재정은 일반보상의 원칙에 입각하여 행동하고 사경제는 특수보상의 원칙에 입각하여 행동하고 있다.

일곱째, 사경제의 목적은 질이나 양에 있어서 확실하고 많은 소득을 얻어 소비경제단위의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데 있으므로 사경제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하지만 재정은 그 자신이 목적이 아니고 국가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목적수행에 필요한 지출은 사양하지 않는다.

여덟째, 공공경제는 목적수행을 위한 수단이므로 목적수행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할 수입만 획득하면 된다. 따라서, 재정은 수지균형의 원칙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사경제는 지출보다 수입이 많은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사경제는 잉여원칙에 의하여 영위되고 있는 데 반하여 재정은 자리심(自利心)에서 행동하지 않고 고상한 도의심의 견지에서 행동해야 한다. 더욱이 지출에 있어 사경제는 절약원칙이나 실익원칙 등 양자가 다 적용되고 있으나 공공경제에 있어서는 정치원칙이 작용될 때가 많다.

우리나라 재정의 특질

재정은 역사적 · 제도적 산물로서 시대와 여건에 따라 부단히 변천하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국가기구의 형태를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보면 고대국가, 통일신라 · 고려 ·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광복 후의 미군정시대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산을 뒷받침할 생산수단과 생산대상의 소유관계, 그리고 생산된 재화의 분배관계 등을 기준으로 역사를 구분하면 고대사회, 봉건사회, 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 자본주의시대 등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리고 재정의 대상을 실물로 볼 것이냐 화폐로 볼 것이냐에 따라 구분하여 각기 특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기구의 형태를 기준하여 우리의 역사를 볼 때 고대국가의 특질은 부족국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정복전쟁을 통하여 승리한 부족들이 광대한 토지와 전리품을 지배하는 절대적 권세가 있었기 때문에 지배계층의 의사 여하에 따라 국가가 운영되었다고 본다.

통일신라 · 고려 · 조선시대는 봉건사회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를 동양적 봉건사회의 성립기로 보며, 고려시대를 동양적 봉건사회의 발전기로 보고, 조선시대를 동양적 봉건사회의 완성기로 보기도 한다.

시기별로 보면 역사적인 구분이 가능하지만, 국가경비의 내적인 면에서 보면 거의 같은 제도와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재정의 특징을 뚜렷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봉건제도의 특성인 국가토지의 절대지배권이 중앙집권자인 국왕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재정의 특질은 토지제도를 어떻게 제정하였느냐에 따라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조세제도도 전조(田租) · 공세(貢稅) · 부역 등 거의 같은 형태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토지제도만 이해하면 조세제도의 특질도 이해된다.

신라에서 조선시대까지 공통적인 재정의 특질을 든다고 하면 세출면의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봉건사회에 있어서는 봉건지배층과 신분적으로 귀족에 속한 사람들의 절대적인 권세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재정이 영위되었다. 재정의 제도적인 특질이라기보다 위정자의 양심적 성향이 어떠하였느냐에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후기의 삼정인 전정 · 군정 · 환곡에서도 알 수 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로는 실물경제에서 화폐경제로 전화하였기 때문에 재정의 특성을 분석하기가 용이하다. 국가의 재정이 화폐에 의하여 영위되면 자연히 국가의 활동은 모두 화폐로 산정되어 내역이 파악되며 이에 필요한 재원도 조세 등에 의하여 조달되기 때문에 재정의 특질이 쉽사리 파악된다.

화폐경제로 전화된 이후의 재정의 특질을 보면, 근대적인 재정제도를 도입하였던 1896년부터 1904년까지는 안정 위주의 균형재정이었고, 1905년과 1906년은 변동기이며, 1907년부터 1910년까지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준비기였다. 그리고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는 일본제국주의 시책에 따라 조선총독부 특별회계라는 이름으로 재정이 운영되었다.

8 · 15광복과 더불어 미군의 진주로 미군정이 시행됨에 따라 미군정의 지배하에서 우리 나라의 재정이 운영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우리의 재정은 우리의 손으로 운영되었으나 경제력이 미약하여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6 · 25전쟁이 발발함과 더불어 어려웠던 우리 경제는 더더욱 어렵게 되고 전시재정과 이에 알맞은 조세체제로 개편되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는 경제의 재건기로서 재정안정계획의 수립과 경제부흥을 위한 조세개혁을 단행하여 재정의 자립화에 역점을 둔 시기이다. 1961년부터 1966년까지는 경제개발의 태동기로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과 실현을 본 기간이다.

재정면에 있어서는 개발세제로의 전환과 자립재정의 추구가 특색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1950년 9월에 제정, 공포되었던 <재정법>이 개발정책의 제도적인 뒷받침이 되도록 1961년 12월 <예산회계법>으로 개정됨에 따라 건전재정 집행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는 고도성장기로 볼 수 있다. 재정면에 있어서는 개발세제의 강화를 통한 재정자립과 정부저축의 증대가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72년 8월 3일 대통령의 긴급명령인 ‘8 · 3긴급경제조치’에 의하여 재정의 경직성을 극복하고자 지방교부세와 지방재정교부금 및 도로정비사업비의 법정교부율방식을 폐지하고 매년의 예산에서 중앙정부가 배분하여 주는 탄력적인 운용도 하나의 특질로서 볼 수 있다.

재정제도는 1960년대 이후 수출지향적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성장지향형 재정구조로 운용되었으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균형있는 발전을 위한 재정정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세제도는 간접세 중심의 체제이며 중앙집권적으로 되어 있고, 경비의 지출내역도 성장지향적으로 나타나 분배의 공정성을 도모하는 데는 크게 미흡하다. 따라서, 앞으로 재정제도는 각 부문이 균형 있게 발전되고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운용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시대의 재정의 역사

고대의 재정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노동도구가 대체로 공동체의 공유였고 생산물을 비교적 균등하게 나누어 소비하였으므로 공공경제와 사경제가 분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즉, 생산수단이 씨족공동체나 부족공동체의 공유에 속하였으며 구성원의 생산과 소비도 공동체를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 뒤 자체 내의 생산력 발전에 따라 사회적 생산관계가 점차 변모되어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각 부족국가 사이에는 각각의 그 발전의 차이에 의하여 지배관계가 형성되어 피지배공동체는 지배공동체에 예속되어 각종 생산물을 조세의 형태로 공납하는 일종의 공납관계(貢納關係)가 형성되었다.

고대국가의 형성기에 나타난 일반적인 양상은 여러 차례의 정복전쟁을 통하여 광대한 토지와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이를 모두 국가의 소유로 하였던 점이다. 정복과정을 통하여 획득한 모든 토지는 원칙적으로 국가의 소유로 하였는데 국가의 토지는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국가에 크게 기여하였던 지배계급인 귀족과 관료군에게 공로를 보상하기 위하여 식읍(食邑) · 녹읍(祿邑) · 사전(賜田) 등의 명목으로 일정한 면적의 토지와 주민을 함께 분여하였고, 다른 하나는 일반 피지배계층인 농민들에게 분급하여 경작하게 한 토지였다.

한편, 삼국시대에는 국유지의 일부를 각 사찰에 분여하여 각 사찰의 경비에 충당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토지를 사전(寺田)이라 하며 특히 신라에는 사전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또한, 고대국가의 국왕은 자기의 직할지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국왕은 자기 자신의 사재를 축적하고 일상의 생활자료를 조달하기 위하여, 또는 종묘의 제물 등을 조달하기 위하여 가장 편리하고 비옥한 토지를 국왕의 직할지로 하였다.

고대사회에는 국가의 지배체제가 공동체를 토대로 하는 집단체제하에 있었고, 또 토지의 지배관계도 공동체적 집단소유의 기초 위에 형성된 토지국유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농민에 대한 국가의 지배양식은 개개의 농민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결합체인 공동체를 상대로 하는 집단적 예속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기관의 물질적 기초를 확립하고 공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징수하는 조세도 우리의 고대사회에서는 국민들에게 직접 부담시킨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단위로 부과하였던 것이 특색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국가의 조세제도는 조 · 용 · 조(租庸調)의 조세체계를 기본으로 하였다. 조(租)는 전세를, 용은 인세(人稅)를, 그리고 조(調)는 호세(戶稅)를 뜻한다. 이 중 주종을 이룬 것은 전세로서 토지의 산물인 곡물로 납부하는 현물세였다. 인세인 용은 부역노동의 물납형태로서 직물 납부가 많았고, 호세인 조는 전세의 부가세적인 성격으로 곡물이나 특산물로 납부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재정

고대국가는 모두 공동체의 강한 유대를 토대로 형성되어 봉건적인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씨족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집단적인 지배관계에 있었다.

6세기 중엽부터 신라의 사회경제는 급속하게 발전하여 공동체 내에서의 계급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씨족공동체 내에서 개인적인 권력이 성장하며 사적인 지배관계가 형성되어 갔다.

토지의 지배관계에 있어서도 고대국가에서는 공동체를 매개로 하는 간접적인 지배관계였으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 및 봉건지배층의 직접적인 지배관계가 형성되었다.

농민의 예속관계에 있어서도 고대국가에서는 농민들이 지배공동체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모든 의무도 공동체를 매개로 하여 부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는 농민이 토지와 더불어 집단적인 지배관계에서 벗어나 국가 및 봉건지배층에게 개별적으로 예속되게 되었다.

통일신라는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로서 토지국유정책을 실시하였다. 토지국유정책은 전국의 토지를 왕토(王土)로 삼아 봉건지배층에 의한 대토지소유의 확대를 제한하며, 국왕의 소유인 토지를 일련의 봉건지배층에게 분배하는 데 있었다.

국왕은 권력의 동반자이며 통일사업의 완수에 있어서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식읍을 각각 사여하였고, 문무관료군에게는 봉록을 주는 대신 지위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급여하는 녹전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불교사찰에 대한 토지의 사여는 사전(寺田)이라는 이름 아래 시행되었으며, 재정적인 수단으로 둔전과 국학생을 위한 녹읍 등을 분급하였다. 그리고 피지배층인 농민들에게는 정전제(丁田制:신라 때 15세 이상의 남자에게 나라에서 토지를 나누어 주던 제도)를 실시하였다.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적 토지정책도 8세기 후반부터 왕실의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정권장악을 위한 귀족들의 싸움으로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중앙집권적 봉건체제의 약화는 봉건관료군으로 하여금 그들의 수조권지를 사유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재정적 토대인 농민들의 점유지를 병설하게 하여 거대한 신흥지주군으로 발전하였다.

통일신라의 조세관계는 조 · 용 · 조에 기반을 둔 전조 · 공조 · 부역노동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토지국유제라는 원칙에 따라 국왕이 최대의 지주이므로 그에 예속되어 있는 농민들에게 정전이라는 이름으로 토지를 대여하여 경작하게 하고 전조 · 공조 · 부역노동 등을 조세로 징수하였으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지대의 형태로 수납하였다고 보여진다.

전조는 정전의 수급자인 농민이 토지생산물의 일부분을 국가에 납부하는 현물지대형태의 조세이다. 농민들은 국가로부터 대여받은 정전을 경작하여 생산물로 생활을 영위하는 한편 생산물의 일부분을 전조로서 국가에 납부하였는데 이것이 국가의 재정적 토대가 되었다.

전조율에 대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재생산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규정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전조율은 식읍이나 녹전 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질서가 잘 유지되었을 때에는 조세율도 안정이 되나 국가의 체제가 무력화하고 지배기구가 비대해지면 조세율은 끊임없이 인상되어 조세체계도 무질서하게 된다.

통일신라도 삼국통일 이후 약 1세기 동안은 안정적인 질서가 유지되었으나 9세기 이후 중앙집권적 봉건체계가 무력화됨에 따라 농민들의 전조부담률은 가중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견디기 어려워 자기의 토지를 세력 있는 지배층에게 투탁하고 그들의 사병이 되거나 또는 도망하여 초적이 됨으로써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경상세적인 특성을 지닌 공세(貢稅)는 호공(戶貢)이라고도 하며 일반 농민들의 수공업제품 및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납부하는 조세이다. 공세는 당시에 중요한 재정적 토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의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상공은 농민들의 자급자족적인 가내수공업제품의 일부분을 국가가 수납하는 것으로서 국가의 공업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농민들이 부담하는 공세인 수공업제품은 질이 저급하였으므로 국왕이나 봉건지배층의 직접적인 수요품은 되지 못하였고 주로 군인이나 하급군사들에 대한 현품지급에 충당되었으며 일부분은 대외교역품으로 충당되었다.

별공은 진귀한 지방적 특산물로서 필요에 따라 국가가 수납하는 것인데 일부분은 왕실에서 소비되었고 일부분은 대외교역품 또는 관영수공업의 원료로 충당되기도 하였다.

부역은 정역(丁役)이라고도 하며 당시의 국가가 농민에게 부담시킨 각종의 무상노동이다. 당시의 국가는 산성의 축조, 궁전의 개수, 사찰의 신축 등을 위하여 농민들에게 많은 부역노동을 강요하였다.

또한, 농민들은 군역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으며 관유지 등의 경작노동을 부담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가 무력하게 되자 지방의 지배층이나 토호 등이 농민을 마음대로 사역하여 농민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고려시대의 재정

고려왕조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를 확립하게 된 것은 976년(경종 1) 실시된 전시과제(田柴科制)의 채택에서부터이다. 전시과는 국내의 경작지와 삼림을 국가의 토지대장에 등록한 다음 문무백관으로부터 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등급에 따라 토지를 지급한 제도를 말한다.

전시의 내용은 관급의 고저에 따르지 않고 관리의 품계에 따라 토지를 차등 있게 지급한 것이다. 품계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였다 하여 품전제라고도 하였다.

전시로서 지급받은 토지는 소유권을 양도받은 것이 아니고 그 토지에 대한 수조권만을 부여받은 것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토지의 수급자는 그 토지를 자유로이 매매하거나 또는 상속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관직은 신분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일시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그 토지가 국가에 반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토지의 수조권은 토지수급자의 당대에 국한되었으므로 수급자가 사망할 경우에는 국가에 반환하여야 했다.

976년에 창설된 전시과는 998년(목종 1), 1014년(현종 5), 1034년(덕종 3), 1076년(문종 30)에 내용이 많이 개정되었다. 하지만 전시과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개정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급대상인 토지의 지급액이 점차 감소된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으면 신분과 더불어 일대를 보유한 데 반하여 관직의 교체는 자주 일어나 새로이 임명된 관리에게 지급할 토지가 차츰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태조가 고려를 창건한 이래의 공신은 전시과에서 제외가 되었는데, 경종 때에 공음전시과라는 것을 설정하여 개국공신과 귀순성주 등의 직계자손에게 공훈전을 지급하였다. 이러한 공훈전은 당초부터 세습이 인정되었으며 수전자가 죄를 범하였을 경우에도 그 자손에게 이급되었다. 공훈전도 일반 과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조권을 이양한 것이나 세습권이 인정되고 있었으므로 당초부터 사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10세기 말엽에 와서는 중앙집권적 통치기구가 정비되면서 공해전시(公廨田柴)가 설정되었다. 공해전시는 중앙 및 지방의 관청에 지급하여 당해 관청에서 소요되는 제반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기 위한 토지였는데, 이를 대별하면 중앙공해전시와 지방공해전시로 나눌 수 있다.

중앙공해전시로는 관원전 · 군자전(軍資田) · 창고전(倉庫田) · 궁사전(宮司田) 등이 있었다. 지방공해전시로는 주전(州田) · 부전(府田) · 군전(郡田) · 현전(縣田) · 관전(館田) · 역전(驛田) 등이 있었는데, 이는 용도에 따라 다시 공수전(公須田) · 지전(紙田) · 장전(長田) 등으로 구분되었다.

품전과 공훈전 및 공해전의 수급자에 해당되지 않으나 국가기관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자에게 여러 가지 명목으로 토지를 지급하였다. 즉, 역화전 · 둔전 · 학전 · 영업전 · 군전 · 구분전 · 외역전 · 적전(籍田) · 사전(寺田) 등이었다.

고려시대의 토지는 수조권의 예속 여하에 따라 전국을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하였다. 공전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이 국가에 있었던 것을 말하고, 사전은 과전이품전 · 궁원전 · 공훈전 등과 같이 토지에 대한 수조권이 개인에게 있었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전이라 하여도 토지에 대한 개인의 지배권, 즉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서도 국가가 최고지배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과의 실시와 통치기구의 정비로 10세기 말경부터 고려왕조의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는 확립되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이후의 사전 확대, 즉 대토지소유의 진전은 공전의 감소를 가져왔고 이는 다시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를 차츰 약화시키게 되었다.

사전의 확대는 상대적으로 공전을 감축시켰고 이는 국가의 조세수입의 감소로 이어져 재정의 빈궁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전조율의 인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간지의 개간을 적극 장려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는 개간법을 제정하여 개간자에게 유리하게 하였으나 봉건귀족들은 농민으로 하여금 토지를 개간하게 하여 이를 사전화하고 더욱 농민들을 수탈하는 기회로 삼았다.

12세기 중엽인 의종 때에는 사전의 확대로 국가의 재정이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의종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국가의 재정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이는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계기가 되어 농민과 무인들의 반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고려도 중앙집권적 봉건체제였으므로 조세체계도 통일신라의 그것과 같이 전조 · 공세 · 부역노동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적으로 체계화되었다.

태조는 농민에 대한 회유책으로 우선 고율의 전조를 3분의 1로 대폭 격감시켰다. 1결당 6석이었던 전조를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인 2석으로 규정하여 농민들의 생활안정을 기하였으며, 봉건세력을 자신의 수중에 규합하여 통일주권을 강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저율의 전조로써는 신라 말기의 사전 확대로 인한 공전의 감축과 함께 어려움에 빠진 국가재정을 충당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992년(성종 11)에는 전조율을 대폭 인상하여 4분의 1로 하였다. 이때의 전조규정은 수전과 한전의 구별은 물론 토지도 3등급으로 나누어 전조액을 정하였다. 이와 같은 전조율은 공전과 사전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사전이 점차 확대되어 감에 따라 공전의 전조율 인상으로도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타개할 수가 없어 사전에 대하여서도 사전세라는 명목으로 새로운 세를 부과하여 부족한 재정을 메울 세원으로 삼았다.

사전세가 도입된 1013년에는 30결 이상의 대토지소유자에 한하여 1결당 5되가 부과되었으나 1069년에는 더욱 인상시켜 7되5합으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대토지소유자인 봉건지배층이 부담하게 된 사전세는 모두 사전민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또한, 농민들에게 부가세의 형태로 모미(耗米)라는 것이 부과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전세 1석에 대하여 1되의 모미가 부과되었으나 1053년에는 7되로 크게 인상되었다. 12세기 이후 무인정권시대에는 이러한 전세가 더욱 가혹해졌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중앙집권적 봉건체제가 더욱 약화되어 국가의 재정은 파국상태였으며 이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품미(品米) · 품포(品布) · 품은(品銀) · 품마(品馬) · 무단미(無端米) · 선세(船稅) · 해세(海稅) · 상세(商稅) · 무장세(巫匠稅) 등의 임시세를 부과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시대의 공세도 신라시대의 그것과 같이 농민들의 수공업제품이나 지방의 특산물 등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상공과 별공으로 구분하였다. 상공은 마포 · 저포 등 농민의 가내수공업제품을 대상으로 일반 농민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한 것인데, 연초에 국가의 필요량을 미리 책정하였다. 별공은 지방적인 특산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 생산자나 또는 산출지역의 농민에게 부과한 것인데 필요한 물품을 수시로 필요한 양만큼 배정하는 것이었다.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가의 재정상태가 빈궁하게 되자 별공은 지방적 특산물에 국한하지 않고 농민에게 일반적으로 부과하게 되어 상공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국가로부터 배정받은 공물을 기일 내에 납부하지 못할 때 서울에 있는 향상으로 하여금 이를 미리 납부하게 하고 농민들로부터 상환받게 하는 공물의 대납제, 즉 공물청부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대납제로서 청부자들이 취리(取利)하는 것만큼 농민들의 추가적인 부담이 가중된 것이다.

몽고의 침략이 있은 뒤부터 농민이 유망(流亡)하여 조세수입이 날로 감소하게 되자 국가는 유망농민의 공세를 잔존농민에게 추가로 부담시키기도 하였고, 또 수년 후의 공세를 앞당겨 징수하는 예징제를 실시하기도 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고려시대의 부역노동에는 다음과 같은 특수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첫째, 생산적인 노동보다 비생산적인 노동, 즉 궁전부곽 · 사찰 등의 신축활동에 종사하였다.

둘째, 부역기간이 부정기적이었다. 즉, 중세 유럽에서는 주부역제였으나 고려시대에서는 우발적인 것이었고 일정한 법률적 부역기간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농업생활을 위하여 농번기에는 가급적 강요하지를 않았다.

셋째, 부역기간이 일반적으로 길었기 때문에 부역활동에 대한 급보제(조역제)가 설정되었다. 조역제란 장기부역노동으로 인하여 생산이 감소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대역시키는 제도였다.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부역노동으로는 왕실소유지의 경작노동, 적전의 경작노동, 진역정(津驛丁)의 교통노동, 군정의 수역(戍役), 국가적 토목노동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재정

조선시대 또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적 봉건체제였으므로 전기의 재정제도와 재정기구는 고려시대와 비슷하였다. 조세체계도 전세 · 공세 · 부역노동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재정상황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기의 전조법(田租法)을 적용하였으나 지배체제가 차차 정비됨에 따라 종래의 불합리한 전조율을 합리화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1389년(공양왕 1) 제1차 양전사업으로 파악된 전결을 국가의 토지대장에 등록한 다음, 1391년 과전법(科田法)의 실시로 왕실 · 문무백관 · 국가기관 등에 각각 소정의 토지를 지급하였다. 1392년(태조 1)에는 공신전(功臣田)을 창설하였고 별사전(別賜田)을 설정하여 공신전에 준하는 토지를 지급하였다.

과전법이 실시된 뒤 사전의 세습이 인정되어 경기도로 제한하였던 토지가 하삼도로 이급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여 1466년(세조 12)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채택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 전기에 지배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1401년(태종 1) 부담의 공평을 기하기 위하여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농작의 실황을 답사하여 전조(田租)를 부과하는 제도이다.

그 뒤 1430년(세종 12)에는 수년간의 생산고를 평균하여 평년의 수확고를 책정하고 이를 토대로 전조율을 정하는 공법(貢法)을 실시하였다. 1444년에는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정하고 그 해의 작황을 고려하여 전조율을 책정하는 전품연분법(田品年分法)을 시행하였다.

한편, 국가는 매년 소요되는 물품의 종류 · 수량 · 품질 등의 명세서를 괘지(罫紙)에 작성하였는데 이를 횡간(橫看)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횡간에 따라 징수목록을 지방관아에 하부하여 백성으로부터 공물을 징수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공물의 품목과 수량 등을 기재한 것을 공안(貢案)이라 한다. 그러므로 횡간과 공안은 국가의 예산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재정기구

행정 각 부 가운데 호조는 재정을 담당하는 최고기관이다. 신라 초기에는 이를 창부(倉府)라 칭하고 전국의 용 · 조(庸調)를 관장하였으며, 뒤에 조부(調府)라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가 이를 삼사(三司)로 고쳐 조정과 국가기관의 전곡(錢穀) 출납과 회계 등을 통괄하는 최고기관으로 삼았다.

1014년에는 무신들의 강권에 의하여 삼사를 도정사(都正司)로 바꾸었으나 1023년에 다시 환원되었으며, 문종 이래 판사 1인을 두어 재신(宰臣)을 겸하게 하고 사(使) 2인(정3품), 지사사(知司事) 1인(종4품), 부사(副使) 2인(종4품), 판관(判官) 4인을 두었다.

또, 1356년(공민왕 5)에는 상서성(尙書省)으로 개칭했으나 1362년에 다시 삼사로 환원되었다. 삼사는 국가재정의 중추기관인 동시에 고려시대의 경제기획청이기도 하였으므로 관제상의 지위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조선 개국 초에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최고 재정기관으로 삼사를 두고 여기서 계획을 세우게 했다. 이에 반해 호조는 단순한 실무의 집행기관에 불과하였으며 고(庫)와 창(倉)은 수지의 사무를 맡았다. 1401년의 관제개혁 때 삼사는 사평부(司平府)로 개칭되었고, 1405년에는 사평부가 호조에 병합되며 집행기관에 불과하였던 호조의 권한이 확대 · 강화되었다.

국무의 태반을 장리하는 큰 기관이 된 호조 안에는 다음의 삼사를 두어 그 사무를 각각 분장(分掌) 시켰다.

① 판적사(版籍司):호구(戶口) · 전토(田土) · 부역(賦役), 토산물의 공납, 농업의 권장, 수 · 한해(水旱害)의 조사, 빈민에 대한 식량의 급여 또는 대여.

② 회계사(會計司):전조(田租) · 부(賦:인신에 대한 과세), 세입 · 세출의 회계, 도량형(度量衡), 서울 및 지방의 미곡 저장, 조정과 국가기관의 지출 조달.

③ 급전사(給田司):문무 관료의 과전(科田) 및 직전(職田), 문무 관료의 유족에 사급하는 토지, 각 관청의 소속전 등의 사무.

한편, 1405년의 관제개혁에서는 속아문(屬衙門) 제도를 확립하여 지금까지 호조의 관리 밖에 속하여 있던 다음의 13관아 및 창고를 호조에 소속시켰다.

① 전농시(典農寺):궁 안의 제사에 쓸 곡식과 적전(籍田)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한 사농시(司農寺)를 1401년에 개칭한 것이다. 후에 봉상시(奉常寺)에 합쳐져 예조의 속아문으로 되었다.

② 내자시(內資寺):궁 안에서 쓰는 쌀 · 국수 · 술 · 장 · 기름 · 꿀 · 소채 · 과일 등의 공급과 궁 안의 연회 및 직조(織造)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1401년에 내부시(內府寺)를 내자시로 개칭하고 1403년에는 1392년에 창설한 의성고(義成庫)를 병합하였다.

③ 내섬시(內贍寺):각 궁(宮), 각 전(殿)에 대한 공상물(供上物)과 2품 이상의 자에게 대한 하사주와 왜인(倭人) · 야인(野人)의 공궤(供饋)와 직조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한 덕천고(德泉庫)를 1403년에 내섬시로 개칭하였다.

④ 군자감(軍資監):군수물자의 저장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하였다.

⑤ 풍저창(豊儲倉):미곡 · 두류 · 뜸[草屯] · 지물 등의 물품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기관이며, 1392년에 설치하였다.

⑥ 광흥창(廣興倉):문무백관의 녹봉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하였다.

⑦ 공정고(供正庫):왕실 창고의 미곡과 왕실용의 장 등의 물품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한 요물고(料物庫)를 1401년에 공정고로 개칭하였다.

⑧ 제용감(濟用監):진상하는 직물 및 인삼과 하사하는 의복 및 사(紗) · 나(羅) · 능(綾) · 단(緞)과 포화(布貨:화폐로 사용하는 베)와 채색(綵色)으로 염색하는 것과 직조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하였다.

⑨ 평시서(平市署):시장과 상점을 감독하며 도량형을 공평하게 하고 물가를 조절하는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한 경시서(京市署)를 그 뒤에 평시서로 개칭하였다.

⑩ 의영고(義盈庫):기름 · 꿀 · 밀납, 소찬(素饌)으로 쓰는 각종 물품, 호초(胡椒)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하였다.

⑪ 장흥고(長興庫):석자(席子) · 유둔(油屯:종이 또는 포목에 기름을 먹인 것) · 지물(紙物) 등의 물품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하였다.

⑫ 양현고(養賢庫):성균관 유생용의 미곡 · 두류 등의 물품을 공급하는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하였다.

⑬ 한성부:서울 안의 토지 · 호구 · 농경 · 학교 · 소송 등을 관장하였다.

1406년부터 성종조에 걸쳐 편찬 · 반포하여 완성된 조선의 법전 중 가장 근간을 이루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그 뒤 호조는 호구 · 공물과 부역 · 전토와 양곡 · 식료 및 기타의 재화 등 재정 · 경제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였다.

그 관원으로는 판서 1인(정2품), 참판 1인(종2품), 참의 1인(정3품), 정랑 3인(정5품), 좌랑 3인(정6품), 산학교수(算學敎授) 1인(종6품), 별제(別提) 2인(종6품), 산사(算士) 1인(종7품), 계사(計士) 2인(종8품), 산학훈도(算學訓導) 1인(정9품), 회사(會士) 2인(종 9품)을 두었다.

그리고 호조의 사무분담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호조의 판적사에서는 호구 · 토지 · 전답 · 조세 · 부역 · 토산물 등의 헌납, 농업과 잠업의 권장, 풍흉의 조사, 빈민에 대한 양곡의 무상급여 또는 대부와 회수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회계사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전곡의 저장, 세입 · 세출의 회계, 관원 교체 때에 전임자가 관장하던 물화(物貨)에 대한 조사를 시행하여 부족함이 없는 자에게는 책임을 해제하는 증서를 내어주는 해유(解由), 지방 수령들이 관리하는 물품 또는 양곡의 부족인 휴흠(虧欠) 등에 관한 사무를 장리한다. 그리고 경비사에서는 서울 안의 제반 경비의 지출과 부산에 있는 왜인의 식량 등에 관한 사무를 장리한다.

종래의 급전사가 경비사로 개칭된 까닭은 종래 직산관(職散官)을 불문하고 일정한 품계를 가진 자에게 지급된 과전을 폐지하고 현직 관료에 한하여 직전을 지급하는 제도로 바뀌어, 한때 정부가 직접 수조하여 중앙 창고에 수납한 뒤 녹미를 지급하기로 하였으므로 급전 사무가 필요없게 된 때문이다.

또, 『경국대전』에 나타나는 호조의 속아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내자시, ② 내섬시, ③ 사도시(司䆃寺, 공정고를 1414년에 사도시로 개칭하였다), ④ 저화(楮貨)의 제조 및 외거노비(外居奴婢)의 공포(貢布)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며, 1401년에 설치한 사섬서(司贍署)를 그 뒤 개칭한 사섬시(司贍寺), ⑤ 군자감, ⑥ 제용감.

⑦ 어물 · 육류 · 소금 · 목탄 · 횃불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사재감(司宰監), ⑧ 풍저창(후에 장흥고에 흡수되었다), ⑨ 광흥창, ⑩ 중앙과 지방의 선박과 군함을 관리하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한 사수감(司水監)이 후에 기구개편으로 바뀐 전함사(典艦司).

⑪ 평시서, ⑫ 궁중의 술과 단술의 공급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1392년에 설치하고 1785년 이전에 폐지된 사온서(司醞署), ⑬ 의영고, ⑭ 장흥고, ⑮ 원포(園圃)와 소채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청인 사포서(司圃署), ⑯ 양현고.

⑰ 서울을 중부 ·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의 5부로 나누고 각 부내의 방리(坊里) 주민의 불법행위, 교량, 도로, 반화(頒火:나라에서 매년 입춘 · 입하 · 입추 · 입동과 6월의 土旺日에 불씨를 새로 만들고 전의 불씨를 버리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 새 불씨를 궁전, 각 관청,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금화(禁火:화재 예방을 위하여 나라에서 불 쓰는 것을 제한하는 것), 동리 출입문의 경비, 가옥 대지의 측량, 시체의 검안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인 오부(五部) 등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1405년의 호조 속아문 외에 사섬시 · 사재감 · 전함사 · 사온서 · 사포서 등의 속아문이 증설된 반면, 종전의 전농시는 봉상시에 병합되어 예조에 소속되었다.

조선 후기의 재정

재정상황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같이 공물수납에 사주인(私主人)과 경주인(京主人) 등이 있어 납공청부제인 방납(防納)이 성행하였다. 16세기 말엽에 접어들면서 방납의 폐해가 심각해지자 종래의 공부제를 폐지하고 대동법을 성안하여 17세기 이후 일부 지방부터 시행하였다.

대동법은 종래의 공물을 미곡으로 환산하여 납부하게 하고 국가는 이것으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제도였다. 대동법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처음 경기도에서 실시되었는데 1624년(인조 2)에는 강원도,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 1662년(현종 3)에는 전라도, 1677년(숙종 3)에는 경상도, 1704년에는 황해도에서 실시되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국민의 부담을 토지에 집중시킴으로써 단일화되었다. 선혜청(宣惠廳)을 중심으로 세출 · 세입 실적을 보면 〈표 1〉과 같다.

연도 1759 1795 1807
청\구분 세입 세출 세입 세출 세입 세출
영남청 93,859 70,788 69,046 79,032 78,726 74,461
호남청 109,597 96,640 58,282 83,583 88,584 75,785
호서청 73,090 70,734 37,582 66,526 58,365 62,600
경기청 25,300 46,353 14,897 38,798 20,230 34,276
강원청 9,867 18,738 11,929 14,182 12,412 14,237
해서청 5,926 1,985 11,390 1,496 13,807 1,405
합계 317,639 305,238 203,126 283,617 272,124 262,764
〈표 1〉 선혜청의 세입 · 세출 (단위 : 석)
*자료 : 朝鮮王朝財政史硏究(金玉根, 一潮閣, 1988).

1759년( 영조 35) 1만2401석, 1807년( 순조 7) 9,360석의 세입초과를 나타내고 1795년( 정조 19)에는 8만491석의 세출초과를 기록하였다.

도명 세수량 상납량
경기도 35,894 22,482
강원도 34,556 7,383
충청도 94,383 65,613
전라도 149,800 103,539
경상도 151,498 89,548
황해도 58,280 11,429
평안도 20,000 9,000
함경도 25,378 3,152
합계 569,789 312,146
〈표 2〉 세수량 및 상납량 (단위 : 석, 1769)
*자료 : 朝鮮王朝財政史硏究(金玉根, 一潮閣, 1988).

〈표 2〉는 1769년의 대동 · 수미(收米) · 상정세(詳定稅)의 도별 세수액과 상납실적이다. 이 연도의 3세 세수총액은 후기 전세의 약 3배나 되는 56만9798석이고 중앙 상납총액은 세수액의 55%에 상당하는 31만2146석이다.

『조선왕조재정사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재정의 수입형태는 물납공조(物納貢租)와 역역(力役)으로 구분된다. 국가는 공부제에 의거하여 직접생산자로부터 농수산물과 수공업제품 등 각종 생산물을 현물형태로 징세하여 공공경비에 충당하였다. 토지를 대상으로 하는 지조(地租)와 가호를 대상으로 하는 공부 중심의 공납제는 초기의 과전법 아래에서 시행되었다.

17세기 이후 여러 생산 부문에서 소상품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교환경제로 발전하여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재정제도가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

조세의 수취와 급부방식은 이제까지의 조 · 용 · 조 체계에서 조 · 용으로 전환되었고, 과세의 보편성과 합리성의 실현, 재정난의 완화, 실물화폐재정의 확립, 예산제도의 확립 등 재정 부문이 획기적으로 발전되었다. 1651년부터 1807년까지의 세입내용은 〈표 3〉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다.

연도\내용 전미 대두 면포
(석) (석) (석) (필) (필) (양) (양)
1651(효종 2) 99,270 16,440 41,727 109,100 5,000 - 39,093
1668(현종 9) 103,963 15,032 51,391 86,650 5,000 - 30,262
1707(숙종 33) 107,914 31,158 53,158 87,350 13,550 66,260 17,733
1723(경종 3) 98,511 14,590 63,527 78,900 11,500 115,026 31,156
1749(영조 25) 113,840 70,013 36,650 78,750 7,500 169,790 16,530
1785(정조 9) 127,620 4,037 41,393 - - 219,830 620
1807(순조 7) 117,096 9,684 4,372 - - 306,986 10,513
〈표 3〉 호조 1년의 세입내용 추이
*자료 : 朝鮮稅政史(張炳淳, 普成社, 1973).

재정기구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 이후 조선정부는 미증유의 재정난에 직면하게 되어 종래의 재정조직에 큰 변화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비확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난중에 절박하게 제기된 군량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각처에 둔전을 확장하였다. 또한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양향청(粮餉廳)을 신설하고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그 제조(提調)를 겸하게 하였다.

또, 1608년에는 호조의 관장에 속해 있던 공물제도가 대동법(大同法)에 의하여 변통되었다. 즉, 상하 공물의 부담을 균등히 할 목적으로 일률적으로 전결을 대상으로 정률과세(定率課稅)하기로 하였다. 대동법이 처음 경기도에 실시될 때 이를 관장할 경기청과 종래의 물가조절기관인 상평청(常平廳)을 같은 해 병합하여 선혜청을 특설함으로써 호조의 관장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선혜청은 대동법 시행이 각 도로 확대됨에 따라 각 도의 대동청을 흡수하고 그 기구를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고 1638년에는 흉년이 계속되자 임진왜란 이후 폐절된 진휼청(賑恤廳)을 부활시켜 선혜청이 그 사무를 처리하게 하였으며, 1648년에는 상평청과 진휼청을 합쳐 한 청으로 하고 평시에는 상평청의 이름으로 물가조절기관으로 삼고, 흉년에는 진휼청의 이름으로 궁민구제기관으로 삼아오다가 1687년에 양 청을 모두 선혜청에 예속시켰다.

임진왜란 이후의 근 반세기간은 이괄(李适)의 난 · 정묘호란 · 병자호란이 계속되는 전란기였다. 따라서, 그 동안의 국책의 대부분은 전시 및 전후의 대책이어서 주로 선혜청에 그 초점이 집중되었으며, 상평청의 선혜청 예속이나 진휼청의 부활도 그러한 국책의 강화와 확충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1751(영조 27)년에는 군포(양역) 부담의 일부를 결작(結作)이라 하여, 공물을 전세화한 대동법과 마찬가지로 전결과세하는 균역법(均役法)이 성립되었다.

즉, 양역의 군포부담을 다소 감하여 준 반면에, 6도의 전결에 1결당 돈으로는 5전, 쌀로는 2말씩을 과징하는 신세법이 제정, 실시되었으며, 대동미를 관리하는 선혜청과 별도로 결작미(전)를 관리하는 균역청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그 실무는 모두 선혜청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다가 1753년에는 균역청마저도 선혜청 산하에 두게 됨으로써 선혜청은 호조를 능가하는 재정기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임진왜란 이후 재정난의 타개책으로 실시한 세제개혁에 따른 신세법으로 말미암아 선혜청이 특설되고, 이에 종래의 상평청 및 부활된 진휼청까지 흡수되었다. 하지만 둔전의 일부는 양향청에 소속시켜 훈련도감이 관장하였다.

그 결과 호조 관장의 조세에는 다만 고래의 전세(田稅)만 남게 되어 호조의 권한이 현저히 축소된 데 반하여, 신기관인 선혜청은 조선 후기의 가장 거대한 재정기관이 되었다. 훈련도감둔전은 1667년에 이르러 다시 호조의 관장으로 돌아갔으나 여전히 양향청의 명칭으로 존속되어 일명 별영색(別營色)이라 불렸다. 1710년에 사축서(司畜署:가축 이외의 짐승을 사육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며 태조 1년에 설치하였다)를 호조에 소속시켰으나 『대전통편』 간행 이전에 이를 폐지하고 그 일을 호조에 넘겼다.

1785년에 간행된 『대전통편』에 의하면 종래의 경비사를 별례방(別例房)이라 개칭하고 경비사의 사무 분장을 세분하여 여러 분방(分房)을 설치하였다. 본래 삼사의 재정기관은 중국의 역대 재정관서에서 모방한 것인데,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으므로 그 사무를 분장한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별례방에서는 서울 안 각 관아의 경비 지출과 왜인에 지급하는 식량 등의 사무를 맡아본다.

② 전례방(前例房)에서는 종묘와 사직 등의 제물, 사행방물(使行方物:중국에 가는 사신이 가지고 가는 토산물) 및 예장(禮葬)의 용품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다.

③ 판별방(版別房)에서는 특별히 무역하는 사무를 맡아본다.

④ 별영색(別營色)에서는 훈련도감 군병의 급료 지급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다.

⑤ 별고색(別庫色)에서는 공물의 지급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다.

⑥ 세폐색(歲幣色)에서는 각 계절에 중국에 보내는 사신이 중국 황제에게 바치기 위하여 가지고 가는 예물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다.

⑦ 응판색(應辦色)에서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물건의 지급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다.

⑧ 은색(銀色)에서는 금과 은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다.

『경국대전』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속아문 중 사섬시 · 사온서는 이미 폐지되었고 풍저창은 장흥고에 흡수되어 14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뒤 1808년경에 찬진한 『만기요람』의 호조각장사례(戶曹各掌事例)에 의하면 호조에는 ① 판적사, ② 전례방, ③ 별례방, ④ 판별방, ⑤ 세폐색, ⑥ 응판색, ⑦ 은색, ⑧ 관원과 잡직(雜職) 및 각 군문 · 아문 · 장교(將校) · 아전(衙前) 등의 급료로 주는 곡물과 포를 관장하는 요록색(料祿色), ⑨ 별영, ⑩ 별고.

⑪ 호조 내의 관원들의 잡비와 공용잡무를 맡아보던 한 분장으로 공문서 작성에 소요되는 수수료 수봉작지조(收捧作紙條)와 관원의 녹봉 이외에 사사(私事)로 부리는 하인의 급료로 더 주던 전곡이나 포백인 구가(驅價:벼슬아치에게 그가 사사로 부리는 하인의 급료로 녹봉 외에 얹어주던 돈이나 물건)와 거촉(炬燭, 초) 등의 일체 필요한 물건을 관장하던 잡물색(雜物色), ⑫ 회계사, ⑬ 돈을 주조하는 데 필요한 동 · 철을 관장하며 돈을 주조할 때 임시로 베푼 직소(職所)로 1788년에 설치한 주전소(鑄錢所) 등이 있었다.

또, 호조 안에 산학청(算學廳)을 두어 산학에 능한 자 60인을 선발하여 계사(計士)로 삼아 각 장에 배치하되, 수시로 직무를 교대시켰다. 또, 각 장마다 서리 · 고직이 각각 있었으나 회계사에는 계사만 있었다.

『만기요람』의 호조각장사례에는 『대전통편』의 이전(吏典)에 규정된 분방보다 요록색 · 잡물색 · 주전소 등이 증설되었을 뿐 아니라, 예빈시(禮賓寺) · 조지서(造紙署) · 와서(瓦署) · 전설사(典設司) 등이 호조의 속아문으로 되어 재정기구는 더욱 복잡해졌다. 1866년(고종 3) 행정법규로 편찬된 『육전조례 六典條例』의 규정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만기요람』에는 호조의 각 창고로 ① 1609년에 지칙(支勅)하는 물자를 저장하는 곳으로 창설한 분호조고(分戶曹庫), ② 잔치나 큰 모임이 있을 때에 사람을 많이 앉히기 위하여 대청 앞에 잇대어서 임시로 베풀던 자리인 보계(補階)와 교량 등의 재목을 쌓아두던 곳인 목물고(木物庫), ③ 1392년에 군수물자를 저장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나 지금은 급료를 지급하는 군자감.

④ 광흥창, ⑤ 별영, ⑥ 1640년에 설치하였으며 공가(貢價)와 아전의 급료를 관장하는 별고(別庫), ⑦ 1392년에 설치하였다가 뒤에 폐지하고 장흥고에 병합하였으며 내시(內侍)의 녹료(祿料), 노인의 세찬(歲饌), 사신의 사미(賜米)를 관장하는 풍저창, ⑧ 예빈시, ⑨ 양현고 등이 있다.

조선왕조 개국 이전에는 백성들로부터 조세를 어떻게 과징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조선왕조 개국 초의 제도를 통하여 추측하건대 아마도 징수기관을 별도로 설치하지 않고 중앙에서 각 주 · 현에 배부하여 납부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각 주 · 현에 있어서의 조세는 일단 각 주 · 현창(州縣倉) 또는 부근의 조창(漕倉)으로 수송하여 두고 지정된 일정한 기간 안에 조선(漕船)에 의하여 서울로 조운되었으며 전국 13개 조창에는 판관(判官)을 두어 조세 수납을 맡았다. 납기 안에 경창(京倉)에 수송되지 않은 경우에는 주 · 현관(州縣官) 및 창관(倉官)이 책임을 져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전국의 조세 징수가 지방행정관의 겸장에 속해 있었다. 수령은 관찰사의 감독하에 그 행정구역 안에서의 과세 · 수납의 모든 책임을 졌다. 공부(貢賦)는 각기 그 생산지방 백성들로 하여금 직납(直納)하게 하다가, 이것도 또한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는 다른 조세와 마찬가지로 수령으로 하여금 징수하게 하였다.

만약 수령이 교체되는 경우에 미수납분이 있으면 중앙정부는 해유장(解由狀:책임해제증서)을 발급하지 않는다. 해유장을 받지 못하면 다시 관직에 취임할 수 없다. 단, 전세 · 삼수미 · 대동미 · 결작미를 합하여 자기 재임기간에 미수납분이 쌀 1섬, 목면 1필, 전임자 재임기간중의 미수납분이 쌀 20섬, 목면 1통(50필) 이하의 경우에는 책임을 해제하여 주었다.

군청의 재정관계사무는 대체로 여러 색(色)으로 분장되어 ① 도서원(都書員), ② 대동색(大同色), ③ 균역색(均役色), ④ 결역색(結役色), ⑤ 공색(貢色), ⑥ 사창색(司倉色), ⑦ 제창색(諸倉色), ⑧ 병방색(兵房色), ⑨ 수군색(水軍色) 등이 나누어 맡았다.

사무 분장에는 향리(鄕吏:記官)가리(假吏:書員)를 두어 제반 징수사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이속 밑에 말단에서 일하는 이서(吏胥)가 있었다. 특히, 전정(田政)의 재실(災實)을 조사하여 장부를 작성하는 데는 서원 1인을 각 면에 두고 이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상의 이속들은 모두 토착민이며 거의 세습적인 한 계급을 이루고 세력이 대단하였다.

그 하부조직으로는 호수(戶首) · 면임(面任) · 이임(里任)이 있었다. 호수는 조선 초기부터 매 8결을 1부(夫)로 하되 살림이 넉넉하고 근면한 자를 택하여 정하고, 그 8결에 대한 세곡을 호수로 하여금 경작자로부터 징수, 상납하게 하였다. 면임(뒤의 면장)이나 이임(뒤의 이장)은 각각 그 지역의 덕망 있는 자를 택하여 정하고 부세(賦稅)의 납입고지나 수납과 독촉 등의 일을 담당시켰으나, 이를 징수기관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물납을 원칙으로 한 갑오개혁 이전에는 조전(漕轉)의 규정이 있어서 각 도 연해(沿海)의 일정한 곳에 조창과 조선을 두고 각 수령으로 하여금 당해 군의 세곡을 조창에 영치(領置)하게 했다. 각 창에는 도차원(都差員) · 도사원(都使員)이 있어 이들이 세곡을 검사한 뒤 포장하고 선적하여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교통이 불편하여 조창에 납입할 수 없는 군에서는 그 군에서 스스로 용선(傭船)하여 경창에 직납하게 하고 산군(山郡)에서는 목면 혹은 돈으로 대납하게 하되 운송비는 납세자 부담이었다. 그러나 고종 때에 들어와서 전운서(轉運署)를 설치하여 전운사(轉運使)를 두고 각 조창에 파견하여 각 군의 세곡을 수납하게 하였다.

한편, 1876년 개항 이래 각 항이 점차 무역항으로 개방되어 1884년 총해관(總海關)을 신설하고 관세기관으로 하였는데 관세사무는 모두 청국의 정부에 위촉하였다. 당시 청국의 해관사무는 영국인 하트(Hart,R.)가 장리하였으므로 한국의 세관도 그의 감독하에 두고 독일인 묄렌도르프(Möllendorff, P. G. von.)가 이를 맡았다가 그 뒤 영국 · 미국 · 독일 등 여러 외국인이 차례로 관장하였다.

총해관이 총세무사청(總稅務司廳)으로 개칭되고, 서울에 총세무사, 지방 각 항에는 세무사를 두었다. 관세사무는 1893년 이래 1905년 11월 메가다(目賀田種太郎) 고문에 인계되기까지 영국인 브라운(Brown,J.M.)이 총세무사의 직을 맡아 왔으며, 청일전쟁 이후 청국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관세사무는 당초부터 탁지부 소관에서 벗어나 외국인의 관장하에 독립기관으로 존속하였던 것이다.

갑오개혁 이후의 재정

재정상황

1894년 갑오개혁으로 재정제도는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

재무기구의 일원화를 위하여 탁지아문(度支衙門)을 신설하였다. 그 기능은 전국의 재정통계 · 출납 · 조세 · 공채 및 화폐의 관리를 총괄하는 것이다. 이를 운영할 예산에 관한 일은 1895년 <회계법>이 제정되어 운용되었다. 이로써, 국가의 재정운영이 실물형태에서 화폐로 전환되었고 은행이 설립되었으며 새로운 은본위제도가 채택되어 근대적인 재정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896∼1910년까지의 재정운영을 시기별로 보면 1896년부터 1904년까지의 안정기, 1905년과 1906년의 변동기, 1907년부터 1910년까지의 침략준비기로 구분할 수 있다.

1896년부터 1904년까지는 제도의 변화가 거의 없었고 예산도 안정 위주의 균형예산을 자주적으로 운영하였다. 1905년과 1906년은 국권의 일부가 이미 침략당하였고 고문이란 명목으로 탁지부의 실권을 빼앗겨 적자예산으로 재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는 침략준비기로 경상예산에서는 경찰비와 재무비가 크게 증가하였고 임시예산은 변칙적으로 운영되었다. 1906년과 1909년의 세입과 세출 내역은 〈표 4〉에 나타난 바와 같다.

1906 1907 1908 1909
세입 조세 7,375 9,733 10,518 11,335
인지수입 30 158 195 234
역둔도수입 - - 750 1,379
관유재산수입 74 13 1,176 951
잡수입 6 12 771 1280
공채수입 - 6,542 3,903 8,438
차입금 - - 5,960 4,654
기타 - - - 957
합계 7,485 16,458 23,273 29,228
세출 황실비 1,300 1,339 1,500 1,500
경찰비 251 1,413 1,995 2,181
지방행정비 660 777 1,150 1,287
국방비 1,380 1,322 315 322
재무비 3,098 7,526 10,853 13,177
교육비 203 560 383 628
산업비 112 634 1,186 1,320
토목비 189 1,833 2,072 1,929
국채비 415 1,456 2,071 4,322
기타 359 516 1,828 2,562
합계 7,967 17,376 23,353 29,228
〈표 4〉 세입 · 세출내역(1906∼1909) (단위 : 천원)
*자료 : 朝鮮財政의 構造(金命潤, 高麗大學校出版部, 1971).

재정기구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이를 계기로 무력으로써 조선정부를 전복, 친일내각을 구성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시켰으며,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일본공사가 제의한 개혁안에 따라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1894년 6월 중앙관제의 대개혁에 착수하여 예로부터 재정의 중추기관이었던 호조를 폐지하고 새로이 탁지아문을 신설하여 전국의 재정 · 양계(量計) · 출납 · 조세 · 국채 및 화폐 등 일체의 사무를 총괄하며 각 지방재무를 감독하게 하고, 아울러 탁지아문에 총무 · 주세(主稅) · 주계(主計) · 출납 · 국채 · 저치(儲置) · 기록 · 전환(典圜) · 은행 · 회계의 10국을 둠으로써 재정의 근대적 전개가 시작되었다.

다음해인 1895년 관제를 개혁하여 탁지아문을 탁지부로 개칭하고 사세(司稅) · 사계(司計) · 출납 · 회계 · 서무의 5국을 두었으며, 이어 별도로 전환국을 두었다.

한편, 종래 호조와 병립하고 있던 선혜청과 이에 예속된 상평청 · 진휼청 · 균역청 및 각 도의 대동청을 폐지하고 또 양현고 · 장흥창 · 평시서 · 제용감 · 군자감 · 광흥창 · 전설사 등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종래의 다양했던 중앙정부의 재무기관을 일원화하였고, 국가의 재정기관은 탁지부 · 세관 · 황실의 삼자로 분립된 셈이다. 그리고 1898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신설, 탁지부대신 직속의 독립관청으로 하고 1901년 지계아문(地契衙門)으로 개칭하였다가 1904년에는 이를 폐지, 탁지부 안에 양지국을 신설하였다.

한편, 징세기관에 있어서는 1895년 3월 종래 지방행정관이 겸장하던 징세권이 탁지부 소관의 감독기관인 관세사(管稅司)와 징수기관인 징세서(徵稅署)에 이관되고 4월 각읍부세소(各邑賦稅所)를 두어 부세와 징수로 이원화하였다가 같은 해 9월 <세무시찰관장정 稅務視察官章程>과 징세서 및 각읍부세소의 기능을 겸한 <각군세무장정 各郡稅務章程>을 제정, 반포하였다.

따라서, 이원화되었던 부과와 징수의 사무가 다시 일원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1896년 4월 폐지되어 갑오개혁 이전으로 완전히 되돌아가게 되었다.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식민지통치에 적합한 재정기구로 개편할 목적으로 1904년 8월 제1차한일협약을 체결하게 하고 이에 의거, 재정고문으로 메가다(目賀田)를 그 해 10월 파견하였다.

그는 목적 수행을 위하여 재정고문부(財政顧問部)를 설치하고 국내 주요 각지에 고문지부 또는 분서를 두어 지방의 일반 재무감독을 맡게 하고, 1905년 11월 브라운으로부터 총세무사직을 인수하여 관세사무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1906년 통감부 설치 후에는 재정고문부가 통감부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1907년 3월 통감부에 재정감사청(財政監査廳)을 신설, 감사장 1명과 재무감사관 20명으로 구성하고 재정감사장에는 메가다 고문이 임명되었으며, 그 해 5월에는 총무 · 세관 · 이재(理財) · 세무 · 주계의 5국을 두어 재정고문부와 동일한 조직을 갖게 되었다.

그해 6월 재정고문부는 다시 경성을 비롯한 주요지 5개 소에 고문감부(顧問監部)를 두고 재무감사관을 배치하여 지방재무감사의 일을 맡게 하고, 10월 말까지 종래의 23분서 외에 16개 소를 증설, 39분청(분서의 개칭)에 재무관과 재무관보를 각각 임명, 배치하였다.

이렇듯 재정고문부조직은 고문부 고문감부(5개 소) 외에 전국에 고문지부(1개 소) 분청(39개 소)이 설치되고, 이에 고문 이하 410여 명의 일본인이 배치되었다. 이로써 우리 나라 재정의 집행 및 감독기관은 일제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한편, 1905년 우리 나라 정부재정기구인 탁지부의 관제를 개편하여 관방 · 사계 · 사세 · 인쇄 · 출납의 1방 4국을 두고 탁지부 관할하의 지방징세기구에 재정고문부속원 · 경찰고문부속원으로 일본인을 파견하여 지방재무를 감시하였다.

또, 징세기구에 있어서는 1906년 군수층을 징수사무에서 배제하기 위하여 독립된 징세기관을 특설하였다. 즉, 관세관관제(管稅官官制)를 제정하여 탁지부대신 직할하에 각 도에 감독기관인 세무감, 지방의 주요지에 집행기관인 세무관을 각각 두고 각 군에는 세무주사를 파견하고 주재시켜 세무를 분장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실적을 거두지 못하자 1907년 6월 세무감의 소재지를 세무감부(13개 소), 세무관의 소재지를 세무서(50개 소), 세무주사의 소재지를 세무분서(181개 소)로 개편하고 세무감은 도관찰사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였으며, 종래의 세무관 36명을 50명으로, 세무주사 168명을 307명으로 증원하였다.

최하급의 징세 단위인 면 · 동 · 이에서는 면장이 세무관 · 세무주사의 인허를 얻어 다액납세자 5명 이상의 임원과 그 중에서 선출된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으로써 지방 하급 징세기관을 구성하고, 세무관(세무주사)은 면장에게 납세고지서를 발부하며, 면장은 이에 따라 임원들과의 협의에 의하여 면 내의 각 납세자에 대한 부과금액을 정하여 납입통지를 하고, 공전영수원으로 하여금 현금을 영수, 상납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식민지 통치기구의 수립에 광분한 일제는 그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우리 나라에서 염출하기 위하여 재정고문부 소속과 탁지부 관할하의 감독기관 등을 동원하여 이중 · 삼중의 감독체계를 마련하고, 또 일본인 경찰관의 지원까지 받았던 것이다.

1906년의 관제개혁으로 종래의 출납국을 폐지하고 이재 · 검사의 2국을 신설하였으며, 수도국(水道局) 및 건축소(建築所)를 탁지부대신 감독하의 독립관청으로 새로 두었다. 또, 징세기구에 있어서는 1907년 5월부터 관민간의 의사소통 내지 자문기관으로 지방자산가를 1군 1명 이상씩 관선하여 5명 내지 10명으로 구성하는 지방위원회(地方委員會)를 세무서 소재지(50개 소)에 두었다.

우리 나라의 재정 일체를 명실공히 완전히 장악한 일제는 종래 서로 대립하고 있던 한일 양국의 재무감독 및 집행기관의 병립이 필요없게 되자 이를 통일시켰으며, 재무기관을 행정기관에서 독립시켰다. 즉,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체결 후 재정감사청 및 재정고문제도를 폐지하고 재정관계의 일본인을 직접 우리 나라의 정부관리로 등용하였다.

1907∼1908년의 관제 개정으로 관방 · 사세 · 사계 · 이재 외에 재정고문부에서 취급한 재원조사사무를 정리하여 탁지부를 1방 4국으로 구성하고, 감사 · 인쇄의 2국은 탁지부대신의 관리에 속하는 독립관청으로 하였으며, 수도국은 내부로 이속시키고 또 총세무사청을 폐지하여 관세국을 신설, 탁지부대신의 관리에 속하는 독립관청으로 하였다.

또, 일제는 왕실재정을 장악, 왕실재정과 국가재정과의 분리 및 그 정리사업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1908년 7월 임시재산정리국을, 같은 해 1월 궁내부 경리원에서 경영한 홍삼전매사업을 탁지부에 이속시켜 삼정국(蔘政局)을, 1910년 3월에는 새로이 토지조사국을 각각 신설하여 모두 탁지부대신 관리하의 독립관청으로 하였다.

지방재무기관에 있어서는 재무감독기관으로 재정고문감부 소재지에 재무감독국(5개 소)을 신설하고, 집행기관으로 종래의 세무서(50개 소) 및 분서(181개 소)의 소재지에 재무서 231개 소를 두었다.

이 개정으로 인해 기존의 세무감은 전폐되어 도찰사(13명)는 세무에 전혀 관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재정기구와 재정집행권의 장악을 통해 일제는 우리 나라 재정을 총독부재정으로 완전히 귀속시킬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재정상황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헌법에 규정된 긴급재정처분권에 따라 재정을 구한국정부의 <예산회계법>에 의하여 당분간 답습하여 운영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10년 9월 회계에 관한 두 개의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하나는 조선총독부의 회계는 일본정부의 1개 특별회계로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법률 가운데 <회계법> 등 9개의 법률이 우리 나라에서 1910년 10월부터 적용되어 시행된다는 것이다. 재정구조면에서의 특징은 일본 자국의 일반회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11년부터 1945년까지의 세입내역은 〈표 5〉에 나타난 바와 같다.

구분 1911 1919 1923 1929 1935 1939 1945
세입 조세 12,440 38,519 34,392 45,987 64,364 140,107 648,215
인지수입 863 9,120 9,381 11,372 18,700 - -
전매익금 - - 5,179 15,710 21,022 - -
관업 및 국유재산수입 11,791 23,273 40,360 108,416 154,905 375,491 1,276,644
공채및차입금 10,000 14,435 26,595 13,747 20,922 134,017 574,788
보충금 12,350 - 15,017 15,423 12,826 15,878 246,713
기타 4,840 40,456 21,789 29,924 37,480 135,202 370,747
합계 52,284 125,803 152,713 240,579 330,219 800,695 3,117,107
행정비 6,466 9,574 18,321 18,875 10,660 26,422 333,468
경찰비 6,550 8,368 29,220 29,676 20,926 40,758 101,992
교육비 825 2,403 5,996 8,567 12,079 19,570 89,319
토목비 13,326 7,610 6,182 14,197 15,994 31,310 63,887
산업비 2,439 4,196 10,627 20,541 17,861 49,136 582,648
관업비 10,068 24,567 51,241 122,930 152,805 414,285 970,608
국채비 1,733 6,032 12,798 19,447 27,027 35,219 109,167
기타 7,304 14,810 11,622 12,619 32,915 91,284 866,017
합계 48,741 77,560 146,007 246,852 290,267 707,984 3,117,107
〈표 5〉 세입 · 세출내역(1911∼1945) (단위 : 천원)
*자료 : 朝鮮財政의 構造(金命潤, 高麗大學校出版部, 1971).

일본의 일반회계로부터 전입된 보충금이 있고, 조세수입보다 관업 및 국유재산수입이나 공채수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이는 조세가 저항이 높은 반면, 관업이나 국유재산수입은 보상의 원칙이 적용되고 공채는 개인의 직접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으므로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세출의 내역은 관업비와 경찰비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 있다.

재정기구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기구로 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를 두고 그 회계는 특별회계로 처리하되 일본제국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수탈기관의 하나로 중앙에 탁지부를 두어 일반재무행정을 맡게 하고 4국을 총독부 소속의 독립관서로 하였으며 따로 총무부에 회계국을 두었다.

지방에는 종래의 재무감독국 및 재무서를 폐지하여 각 도에 재무부를 두고 부(府) · 군과 읍 · 면의 3단계 조직으로 하는 한편, 징세사무를 지방행정관이 맡도록 하였다. 1912년 4월의 기구개편을 거쳐, 1915년 4월에는 국(局)제도를 폐지하고 장관이 직접 각 과 사무를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대개편은 1919년 3 · 1운동의 거족적인 시위 직후인 8월에 단행되었다. 즉, 부제(部制)를 국제로 격하시키고 재무국으로 개칭하였다. 지방기구도 도장관을 도지사로 개칭하고, 지방자치제의 실현을 위하여 각급 지방단체에 협의회를 두어 지사 · 부윤 · 군수 · 읍장 · 면장의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무단정치 대신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의 토착 부유층을 형식적으로 지방행정에 참여시켜 그들을 일제의 편에 서도록 하는 회유책에 불과하였다.

1921년 4월 연초(煙草)의 전매를 실시하게 되어 전매국이 독립관청으로 신설되고, 1934년 4월 만주사변 이후의 재정수요가 급증하자 조세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세제개편과 동시에 <세무관서관제>를 공포하여 종래 지방행정관이 관장하던 세무행정사무를 분리 독립시켜, 중앙의 재무국 세무과 밑에 서울 및 지방의 5개지에 세무감독국과 9개의 세무서를 신설하여 세무감독과 그 집행을 맡게 함으로써 독립된 세무행정기구를 확립하였다.

1943년 12월 재무행정기구를 전시체제로 개편함에 따라 세무감독국을 폐지하고 각 도에 재무국을 두어 재무행정을 맡게 하고 세무서도 96개로 축소하였다.

광복 이후의 재정

재정상황

8 · 15광복 후 미군정하의 재정은 당시의 군사주둔비를 포함한 사회혼란수습비 지변 등 군정에 부합되도록 편성되었으나 해마다 적자가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재정적자는 한국은행으로부터의 차입금으로 보전되었는데 이에 따라 재정인플레이션이 나타나게 되었다. 미군정하의 세입과 세출내역은 〈표 6〉에 나타난 바와 같다.

구분 1946 1947 1948
세입 조세 722 3,600 5,058
인지수입 6 150 260
관업 및 국유재산수입 6,870 11,065 19,712
전매 6,030 7,850 12,162
운수 811 2,700 6,177
기타 29 515 1,373
차입금 3,787 4,010 9,459
기타 415 620 529
합계 11,800 19,445 35,119
세 출 행정비 2,106 1,976 5,746
사법및경찰비 1,356 2,323 4,104
국방비 1,026 1,697 4,969
교육비 387 1,660 1,761
토목비 - 614 730
산업비 1,957 2,260 2,524
관업비 3,991 7,498 13,823
사회보건비 415 867 898
국채비 562 550 533
기타 - - 20
합계 11,800 19,445 35,119
〈표 6〉 미군정하의 세입 · 세출내역 (단위 : 100만원)
*자료 : 朝鮮財政의 構造(金命潤, 高麗大學校出版部, 1971).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광복 이후 누적된 재정적자를 불식하고 건전재정을 지향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건국 초의 재정은 종전보다 크게 팽창하였는데 이는 행정기능의 마비, 군정의 잔무처리 등으로 인한 임시비의 지출과 사회혼란수습비 등의 지출에 기인하였다.

1950년도의 본예산은 정부수립 후 최초의 균형예산으로 안정화 경향을 보였으나 6 · 25전쟁으로 말미암아 전시체제로 새로운 재정인플레이션을 유발하게 되었다.

1953년 휴전 후 재정면에서는 일반세입의 증대와 세출억제에 의한 균형재정의 확립과 원조도입에 따른 대충자금(對充資金)의 효율적인 활용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전시세제가 갖는 단점을 보완하여 1954년에 부흥세제로의 이행을 단행하였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의 세입과 세출내역은 〈표 7〉에 나타난 바와 같다.

구분 1953 1957 1960
세입 조세 2,096 11,590 24,964
전매익금 400 1,620 2,300
외국원조 또는 대충자금 796 22,451 16,763
국채 203 1,523 1,000
산업부흥국채 500 2,964 191
차입금 2,020 950 801
기타수입 668 1,361 2,437
합계 6,683 42,459 48,456
세 출 일반행정비 310 2,273 3,161
국방비 3,260 11,246 14,707
사법및경찰비 532 2,018 2,917
공익사업비 - 1,050 995
사회복지비 - 4,578 8,613
경제적경비 - -10,976 8,365
교육문화비 138 - -
재정투융자 1,093 - -
사회보건비 196 - -
기타 539 2,862 3,237
합계 6,068 35,003 41,995
〈표 7〉 세입 · 세출내역(1953∼1960) (단위 : 100만원)

1962년 이후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실시됨에 따라 개발정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산제도와 재무행정을 개혁하였다. 재정면에서는 건전재정의 원칙을 계속 견지함으로써 재정부문으로부터 일어나는 통화팽창을 억제하고 재정수입의 증대와 경상지출의 억제로 정부 저축을 증대시켜 재정자립도를 높였다.

1971년에는 공평과세, 기업의 내부저축과 투자촉진, 간접세와 유통세 부담의 적정화 등을 도모하기 위하여 세제개혁이 이루어졌다. 1974년에는 종합과세제도를 도입하여 소득의 재분배기능을 강화하고 <국세기본법>을 제정하였다. 1977년에는 부가가치세 제도를 도입하였다. 1966년 이후 세입 · 세출내역은 〈표 8〉과 같다. 또한, 1975년 이후 재정규모와 재정수지의 추이는 〈표 9〉에 나타난 바와 같다.

구분 1965 1970 1975 1980 1985 1989
세입 내국세 421 2,838 10,745 45,316 94,813 191,150
관세 126 509 1,810 7,661 15,661 21,176
전매익금 36 301 1,355 5,100 8,290 15
세외수입 74 217 928 6,383 10,708 43,315
예수금 23 356 1,127 - 57 -
기타 375 237 338 1,891 560 253
합계 1,055 4,458 16,303 66,351 130,089 255,909
일반행정 128 516 1,733 6,292 12,541 22,313
방위비 299 1,023 4,424 23,084 38,025 61,653
개발비 439 2,274 7,068 29,620 53,398 95,024
지방재정교부금 32 541 1,177 4,100 10,085 21,869
기타 37 59 951 1,765 10,016 15,672
합계 935 4,413 15,353 64,861 124,064 216,531
〈표 8〉 세입 · 세출내역(1965∼1989) (단위 : 1억원)
자료 : 主要經濟指標(經濟企劃院, 1983 · 1990).

연도\내역 재정규모 재정수지
총규모 중앙정부 지방정부 총재정 일반회계 특별회계 기금계정 특별계정
1975 24,861 21,236 3,565 -2,045 882 766 347 -431
1980 107,127 86,478 20,649 -3,870 3,192 1,464 784 -338
1985 203,527 150,003 53,524 669 -472 947 -201 -1,204
1988 310,615 231,482 79,132 17,993 20,180 1,340 -1,793 -2,386
〈표 9〉 재정규모 및 재정수지 (단위 : 1억원)
*자료 : 韓國經濟指標(經濟企劃院, 1989).

1980년대에는 복지재정의 수요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복지 부문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선진국에 비하여 크게 미흡하며 다양한 부문에 걸쳐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미흡하다. 또한, 직접세의 비중이 너무 낮으며 공평한 부담이 되지 않고 있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복지수요와 균형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재정제도를 개선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나라 재정은 세입과 세출이 거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1997년의 경우를 보면 약 71조 규모의 세입과 세출을 운영함으로써 균형예산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1997년 4/4분기에 시작된 경제위기를 계기로 하여 재정적자는 대폭 확대되고 있다. 산업생산의 침체와 국민 실질소득의 감소로 인한 세입부족이 심화되고 있다. 또한 200만 명이 넘는 실업자에 대한 대책, 붕괴되어 가는 산업기반 재건을 위한 자금수요 등은 정부재정 적자를 날로 악화시키고 있다.

재정기구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에는 재무국이 설치되고 각 도에는 일제강점기의 재무국제도가 답습되어 오다가 1948년 3월 남한지역의 지방사세관서가 개편됨에 따라 도 재무국은 폐지되고, 서울 및 8개 도에 9개 사세청과 64개 세무서가 설치되었다.

1946년 12월 입법기관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개원되어 한국 근대사상 최초의 재정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입법의원의 결의도 군정장관의 동의를 요하였으므로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우리 헌법은 재정제도로 예산제도 중심의 의회주의를 채택하여 국가재정에 관한 최고의 의사결정은 담당기관인 국회가 행사하고, 세입 · 세출 결산은 심계원의 검사를 거쳐 국회에 제출하게 되었다. 종래 재무부장관 관장하에 있던 사계국(司計局)의 예산사무는 국무총리에게 이관, 그의 소속하에 있는 기획처에서 장리하게 되어 재무행정의 중추기관이 되고, 기획처는 또 종래의 관재처 및 그 소속기관을 인수하였다.

한편, 재무부는 과도정부의 재무부(사계국 제외)와 그 소속기관을 인수하되 재무부국고국을 회계국에 이관시켰다. 또, 같은 해 11월 재무부장관 밑에 사세국(司稅局)을 두어 내국세와 국유재산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여 1실 5국이 되었다. 1950년 4월 종래 도별로 설치되었던 사세청이 폐지되고 서울 · 대전 · 광주 · 부산의 네 곳에만 존치시켰으며 세무서는 67개로 하였다.

1950년 3월 비서실을 폐지하고, 1952년 4월에는 전매국을 폐지하고 전매청(專賣廳)을 신설하였다. 1954년 국무총리제도가 폐지됨으로써 다음해 재무부 직제개편에 따라 예산업무를 기획처에서 재무부로 이관, 예산국(4개 과)과 관재국(管財局, 6개 과)을 신설하고 회계국을 폐지, 국고업무를 이재국으로 이관하였다. 1959년 7월에는 사무 성질과 행정대상이 상이한 국유재산과를 사세국에서 분리하여 관재국으로 이관하였다.

1961년 5 · 16군사정변 직후 정부는 자립경제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효율적인 경제정책의 종합조정기구로서 경제기획원을 신설하였다. 이에 따라 예산업무는 재무부에서 다시 경제기획원으로 이관되고 재무부 이재국의 국고과와 주계과를 분리하여 국고국을 신설하였다. 1964년 12월 재무부 관재국을 폐지하고 외환국(外換局)을 신설하였다.

1966년 3월에는 팽창해가는 재정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세수 증대를 위한 획기적 대책으로 국세청을 발족시켰다. 내국세의 부과 · 징수 및 국유재산 관리업무를 재무부에서 국세청으로 이관하고, 세무행정을 맡아 오던 재무부 사세국은 세제의 기능만을 맡아 세제국(稅制局)으로 개편된 것이다. 동시에 재무부 소속하의 양조시험소도 국세청으로 이관되었다.

또, 1970년 8월에는 관세업무의 증가에 따라 합리적 · 효율적인 관세행정의 집행을 위하여 관세청을 신설하고, 재무부 사세국을 관세국으로 개편하여 관련 정책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1975년 7월에는 외환국이 국제금융국으로 개칭되었다가 1978년에 외환국으로 되돌아갔다. 1979년 6월에는 예산국을 폐지, 예산실(예산총괄 · 예산관리의 2과)을 신설하고 실장 밑에 총괄관 · 관리관 외에 3개 심의관, 14개 담당관을 두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하에서는 국가경제관리, 특히 예산문제에 관한 경제기획원의 독단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경제기획원이 재무부와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재무부는 재정경제원으로 개편되었으나 경제기획원의 인원이 대부분 그대로 재무부로 자리만 옮기는 결과가 되어 당초의 개편 효과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면서는 먼저 재경원을 재경부로 격하시키고 예산과 기획업무를 총리 산하에 두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뒤에 각 당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수정되어 예산에 관한 업무는 별도의 예산청에서 담당하게 하고, 기획업무는 대통령 직속의 기획위원회에 이관시키는 개편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경제운영에 관한 실질적 권한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대통령 직속의 기획예산위원회를 두게 되었다. → 경제, 조세, 예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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