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기암(企菴)·정재(定齋). 아버지는 생원 정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김방렬(金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정시연(鄭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동생 정규양(鄭葵陽)과 함께 수학하였다.
1724년(경종 4)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동생 정규양을 의병장으로 삼고 규율을 모두 갖추었으나, 관군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이후 이남산(尼南山) 밑에 옥간정(玉磵亭)·육유재(六有齋)·태고와(太古窩: 후에 모고헌(慕古軒)으로 개칭)·진수재(進修齋) 등을 지어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또한 향음주례(鄕飮酒禮: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절)와 투호(投壺: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는 유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정만양은 동생 정규양과 함께 경사(經史)에서부터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경제·정치·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 퇴계학에 몰두하면서 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에 관한 토론과 서신 왕래가 많았으며,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본연이요, 기(氣)는 성절(性節)로서 이는 허무공적(虛無空寂)이 아닌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이요, 기는 칠정(七情)에서 나뉘어 용(用)이 수반되는 기질성(氣質性)으로 분리하니, 이는 곧 주(主)요, 기는 곧 자(資)라 정의하였다.
동생 정규양과 함께 「곤지록(困知錄)」·「이기집설(理氣輯說)」·「가례차의(家禮箚疑))·「개장비요(改葬備要)」·「의례통고(疑禮通攷)」·「상지록(尙知錄)」·「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계몽해의(啓蒙解疑)」·「외국지(外國誌)」·「산거일기(山居日記)」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훈(塤)과 지(篪)는 피리에 속하는 악기 이름으로, 형은 훈을 불고 아우는 지를 불어 서로 조화된 음률을 이룬다는 뜻에서 동생 정규양과 함께 「훈지악보(塤篪樂譜)」를 지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순수하며 진실하였고, 글씨에도 능해 전서(篆書)를 잘 썼다. 저서로는 『훈지문집(塤篪文集)』이 있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