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자빈(子賓), 호는 춘수당(春睡堂)·동리(東里). 정여창(鄭汝昌)의 증손으로, 정언남(鄭彦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정유재란 때 부모가 모두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사절(死節)하였다.
학덕과 품행이 증조부 정여창과 비슷하였으므로 소일두(小一蠹)라고 불렸다. 인조 때 군자감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무오사화로 정여창의 유고가 일실되었으므로 정홍서(鄭弘緖)와 함께 유편(遺篇)을 수집하여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를 간행하였는데, 정여창의 유지(遺址)인 화개골[花開洞]을 국공(國工) 이징(李澄)에게 청하여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유호인(兪好仁)의 시서(詩序)와 신익성(申翊聖)의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라는 비백전(飛白篆)을 얻어 속집에 수록하였다.
또한, 함양의 명현을 수록한 『천령지(天嶺誌)』를 편집하고 『한강서간첩(寒岡書簡帖)』과 『제현간첩(諸賢簡帖)』을 편찬하였으며, 저서로는 『춘수당집(春睡堂集)』 5권을 남겼다. 뒤에 도곡사(道谷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