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에는 이미 125개 교회와 3, 500명의 신도가 있었다. 교단의 기원은 열렬한 성경연구가이며 침례교인이었던 밀러(Miller,W.)의 예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밀러는 <다니엘>을 연구하여 예수의 재림이 1843년 3월 21일부터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뒤에 1844년 10월 22일로 세상의 종말시기가 변경되었으나, 그 날이 되어도 예수가 재림하지 않게 되자 밀러파 신도들은 그 날을 ‘대실망’의 날로 언급하면서 동요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재림신앙을 포기하는 가운데 에드슨(Edson,H.)은 밀러의 예언을 재해석하여 예수재림에 대한 신념을 굳건히 하였다.
즉, 예수의 재림 날은 밀러의 계산이 정확한 것이나 예수는 지상에 강림하는 것이 아니고 천상의 성소에 있는 성막 성소를 지나 천상의 성막 지성소로 옮긴 것이라고 새롭게 해석하였다. 또한, 베이츠(Bates,J.)는 제7일인 토요일이 진정한 안식일임을 주장하면서 제7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자녀들만이 가지는 ‘하나님의 인(印)’이라고 가르쳤다.
그 뒤에 그의 견해가 널리 수용되면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준수하는 것이 이 교단의 상징처럼 되었다. ‘대실망’ 직후 하먼(Harmon,E.G.)은 예수가 천상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환상적 체험을 하여 에드슨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1846년 그녀는 예수재림교도인 화이트(White,J.)와 혼인하여 엘렌 화이트(EllenWhite)가 되었고 그녀의 저술은 성경과 함께 기본적 지침서가 되었다.
1850년대 말부터 급격한 종말론의 입장에서 벗어나 현실주의적 태도를 취하여 제도화가 진행되었고, 1860년에는 ‘세븐스데이 어드벤티스트(Seventh-day Adventist)’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였다.
1866년 첫 의료기관인 배틀크릭요양원이 설립되었고, 세속의 나쁜 영향력에서 젊은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1874년 첫 단과대학인 배틀크릭대학이 세워졌다. 그 해에 첫 해외선교사가 파견되었으며, 그 뒤에 활발한 해외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1903년 교단 본부를 워싱턴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04년 5월 첫 신자가 생겼다.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기 위하여 일본 고베항(神戶港)에 내려 배를 기다리다가 일본인 전도사 구니야[國谷秀]로부터 침례(浸禮)를 받은 손흥조(孫興祚)가 우리 나라 최초의 재림교도이다. 그는 수속불비로 다시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때 뱃길에서 하와이개발공사의 계몽원이었던 임기반(林基盤, 본명 林衡柱)을 만나 선교하였다.
그 뒤 두 사람의 활동으로 전국에 200여 명의 안식일 준수자가 생겼으며, 1904년 8월에 구니야전도사를 초청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일본 선교부 책임자 필드(Field,F.W.) 목사가 내한하여 체류하면서 71명에게 침례를 베풀고, 평안남도 용강의 선돌, 강서의 강대모루, 용강의 용동[九龍里], 중화의 바매기[間谷里]등 네 곳에 교회를 조직하였다.
1905년 스미스(Smith,W.R.) 목사가 초대 선교사로 부임하여 평안남도 순안에 선교본부를 정하였고, 1907년 1월에는 샤펜버그(Scharffenburg,M., 史嚴泰) 여사가 내한하여 순안에 의명소학교와 사역자 양성학교를 시작하였다.
1908년 의료선교사 러셀(Russel,R.)이 부임하여 순안에 진료소를 개설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우리 나라가 일본선교지에서 분리되었다. 1909년 선교본부가 순안에서 서울로 이동함으로써 평안도 일원에 제한되었던 선교전선이 한강 이남으로 확대되었다.
1915년 4월 순안에서 열린 제5차 선교지연회에서 이근억(李根億)·정문국(鄭文國) 양인이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7년에는 한국교회가 개척지(mission)에서 대회(conference)로 승격되었다. 다시 1919년에는 3개 지방조직을 거느린 연합회로 승격되었으며, 1922년에는 재단법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조선합회 유지재단이 설립되었다.
1935년 선교 30주년을 맞아 교회수 101개 소, 침례교인 3,232명, 교회출석자 8,400명에 달하였다. 1936년에는 서울위생병원의 전신인 경성요양원이 개원되었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41년 교회기관지인 ≪교회지남 敎會指南≫과 선교잡지인 ≪시조 時兆≫가 폐간되었고, 1943년 12월에는 교회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8·15광복 후 교회재건작업이 활발하여져 1946년 3월 왓츠(Watts, 元倫常)목사가 연합회 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다음해 ≪시조≫지가 복간되었다. 6·25전쟁의 재난을 딛고 1954년부터 1965년까지 비약적인 교세신장을 기록하여 6개 지방대회를 거느리게 되었다.
1971년에는 김이열(金以悅) 목사가 연합회장으로 취임하여 한국인이 교단책임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4과 1994년에 각각 한국선교 80주년, 90주년 기념식을 잠실학생체육관과 올림픽공원 제1체육관에서 개최하였다.
1997년 현재 신도수는 16만 2392명으로 그 중 침례교인은 13만 5910명이고, 교회수는 892개 소, 총 교역자수는 3,085명이다. 본부는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으며, 대표자는 한상무(韓相茂)이다. 주요 간행물로는 ≪시조≫와 ≪교회지남≫, ≪가정과 건강≫ 등이 있으며, 시조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사회사업기관으로는 4개의 위생병원, 교육기관으로는 삼육대학교, 삼육대학병설전문대, 삼육간호전문대 이외에 전국적으로 상당수의 삼육중고등학교와 삼육초등학교, 그리고 전국 각 주요 도시에 삼육외국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기타 사업기관으로 삼육식품, 대학식품, 삼육기술원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교육, 의료, 구호사업 등에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 교인들의 도덕적 윤리적 수준은 높이 평가되었지만, 토요일을 안식일로 고집하는 등 교리적인 문제 때문에 기성 기독교회로부터 지속적으로 ‘이단혐의’를 받아왔다.
신앙적 특징은 엄격한 정교분리, 급박한 종말론, 안식일엄수주의 등이다.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는 1926년에 선교사 허시모(Haysmer,A., 許時模)가 자신의 집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친 한국인 아이의 이마에 염산으로 ‘됴적’이라는 문신을 새긴 사건 때문에 기독교계 내외에서 반선교사·반기독교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를 제공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