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금은(琴隱). 판도판서(版圖判書) 조천계(趙天啓)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전서(典書) 벼슬에 있던 어느 날 밤에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사(評理事) 변빈(卞贇), 박사 정몽주(鄭夢周), 전서 김성목(金成牧),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는데, 이색이 말하기를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여 결의가 되었다.
그 뒤 홍재지(洪載之)·이오(李午)와 더불어 함안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니 비가애영(悲歌哀詠)으로 세월을 보냈다. 1394년(태조 3) 왕이 공조전서를 제수하여 출사할 것을 종용하여 고사하지 못하고 한양궁(漢陽宮)에 들어갔는데, 태조가 탄금(彈琴) 한 곡조를 요구하니 “전왕(前王)의 연석에서도 탄금을 고사하였는데, 지금 왕의 청을 받아들이면 후일에 무슨 면목으로 선왕을 지하에서 뵙겠습니까.”라고 거절하였다.
1399년(정종 1) 왕이 수찰을 내려 태조의 어진(御眞)을 부탁하자, 그는 입대(入對)하여 옛날에 공민왕의 어진 요청에도 불응하였다는 이유로 불응하니, 정종이 노하여 투옥하였다. 태조가 이 사실을 듣고 곧 석방하게 하였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하였다. 저서로는 『금은실기(琴隱實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