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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근대사제도

     1882년(고종 19) 8월 23일 조선의 주정사(奏正使) 조영하(趙寧夏)와 청나라의 직례총독(直隷總督) 이홍장(李鴻章) 사이에 체결된 조선과 중국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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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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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2년(고종 19) 8월 23일 조선의 주정사(奏正使) 조영하(趙寧夏)와 청나라의 직례총독(直隷總督) 이홍장(李鴻章) 사이에 체결된 조선과 중국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이 장정의 원명은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이지만 줄여서 ‘조선통상장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표면상으로 근대 서양제국의 조약 체결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으나, 내용은 종속관계 성격으로서 비준서 교환과 같은 공법상의 절차 없이 체결과 동시에 효력이 발생하였다.
    종래 조선과 청나라간에 이루어지던 교역에는, 첫째 사대사행(事大使行)의 내왕과 관련되어 행해지는 것, 둘째 국경지방인 의주·회령·경원에서 물품을 교역하는 개시(開市), 셋째 사상(私商)의 밀무역 등 세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사행기간의 교역은 물론, 개시에도 갖가지 통제가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사행에 몰래 끼어들거나 개시 때 국법을 어기면서 밀무역을 하여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이른바 잠상(潛商)이 바로 그것이었다. 잠상은 시대가 내려갈수록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가뭄 때문에 농사를 망해 국경을 넘어 만주 벌판에서 농사를 일구는 사람이 많았다. 이것은 양국간에 외교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종래의 엄격한 왕래 통제는 변화가 오고 있었다.
    이즈음 동아시아의 사회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크게 변모하고 있었다. 서양 열강이 자본주의 세계시장을 형성하면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세계 경제 체제 속으로 말려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전근대적 사회는 파괴·해체의 과정을 밟아 근대사회로 이행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조선의 개화운동 등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서양 열강의 충격에 자극받아 구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해 나가는 자강운동이었다.
    조선과 청나라도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종래와 같은 내왕의 제한을 철폐하고 새로운 통상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1880년 후반 조선은 청나라와의 통상문제를 제기하고자 하였다.
    조선에서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서양제국과 통상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여 열강들 간의 세력균형을 이룸으로써 일본과 러시아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청나라와의 통상 논의를 불러 일으킨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에 앞서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병자수호조규」를 맺고 개국하였으나 유생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반대하였다. 당시 개화사상가 수는 적었고, 조선 민중은 여전히 개국은 고유의 사회체제를 붕괴시킨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제1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金綺秀)조차도 일본의 적극적인 근대화 운동에 회의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청나라에 앞서 조선에 침투한 데 당황하여 귀추를 주목하던 이홍장은 1879년 7월경에 조선의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에게 글을 보내 조선의 서양과의 통상을 권유하였다.
    또한, 이홍장은 청나라의 주일공사 하여장(何如璋), 부공사 장사계(張斯桂), 참찬관 황준헌(黃遵憲) 등을 시켜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金弘集)을 설득하여 ‘연미론(聯美論)’을 구체화시켰다.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은 러시아 방어의 대책으로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親中國 結日本 聯美國)’가 제시하였다. 이에 영향을받은 조선의 관제들은 부강의 방법으로서 우선 연미론을 주장하였다.
    한편, 청나라와의 통상문제도 『조선책략』에서 제시되었다. 봉황청(鳳凰廳) 무역을 보다 넓혀 중국 상인으로 하여금 부산·원산·인천 등 각 항구에 와서 통상하게 해야 일본 상인의 농단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개항장에서의 일본의 독점무역, 일본상인의 횡포는 말할 것도 없고, 두만강 하류 일대의 러시아 세력의 진출과 그들의 통상요구로 어차피 청나라와는 해륙 양로의 통상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에 황준헌이 내놓은 방안은 현안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던져준 셈이었다.
    이에 힘입어 조선은 1881년 1월경에 재자관(齎咨官) 이용숙(李容肅)을 청나라에 보내 통상문제를 타진하게 하였다. 이홍장도 원칙에는 동의하고, 다만 조선에서 통상을 자문(咨文)으로 청하게 하였다.
    1881년 2월 오대징(吳大澂)은 러시아 세력의 남하와 일본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고, 청나라의 대외무역을 적극 권장하기 위해 조선과의 통상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청나라 내에서 이미 조선통상에 대한 여론이 고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양국간에 통상문제에 대한 견해가 접근되고 있을 때, 조선은 다시 어윤중(魚允中)을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는 1881년 1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시찰 도중 나가사키(長崎)에서 톈진(天津)으로 직접 건너갔다.
    그 곳에서 이홍장, 초상국총판(招商局總辦) 당정추(唐廷樞) 및 진해관도(津海關道) 주복(周馥) 등을 만났다. 이 때 어윤중이 내놓은 안건은, ① 파사주경 문제(派使駐京問題)와 사대사행의 폐지, ② 회령·경원 개시의 혁파 및 청측 관·상의 공궤(供饋) 폐지, ③ 개해금(開海禁) 및 통상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어윤중은 통상문제를 논의할 정식 파견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먼저 와 있던 김윤식(金允植)과 더불어 청나라의 고위관계를 만나 의견을 교환하는 정도로 그쳤다.
    1882년 2월 17일 어윤중은 이조연(李祖淵)과 함께 문의관(問議官)에 임명되어 통상문제와 연미사를 논의하기 위해 톈진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톈진에 도착하였을 때[3월 28일]에는 미국의 제독 슈펠트(Shufeldt, R. W.)가 이홍장과 세 차례의 회담을 마치고 조미조약(朝美條約)의 초안을 가지고 같은 달 24일 조선으로 떠난 후였다. 결국 조미조약이 성안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연미론의 문제는 덜어진 셈이었다.
    이조연은 4월 초에 귀국하였고 어윤중이 혼자 통상문제를 담당하였다. 문의관 일행이 영선사(領選使) 김윤식과 함께 같은달 29일 해관서(海關署)를 방문하여 북양대신아문(北洋大臣衙門)에 보낼 자문을 건네주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통상문제로 사절단이 상주한다면 그에 대한 장정을 의결하는 것이 좋다는 것, 둘째 회령·경원의 개시를 폐해 러시아의 육로 통상의 요구를 막고, 상민의 공궤는 신장정에 별도로 밝히자는 것, 셋째 사절단이 상주하면 별도로 사행을 파견할 필요가 없다는 것, 넷째 사신은 여비를 자담하고 종전처럼 연로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을 없애자는 것 등이다.
    마침 이홍장이 어머니의 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갔으므로 서리북양대신 장수성(張樹聲), 진해관도 주복과 통상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4월 3일 어윤중과 주복이 제1차 필담(筆談)을 가졌다.
    이 필담에서 어윤중은 종속관계와 통상관계를 분리시키고자 하였다. 반면 주복은 통상관계를 종속관계의 테두리 안으로 묶어두려고 끝까지 고집하였다 결국 위의 안건 중 셋째 항과 넷째 항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둘째 항도 회령 개시는 그대로 두고 경원 개시와 상인 공궤를 폐지하는 데 동의하였다.
    결국, 첫째 항도 대등한 국가간의 조약이 아니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밝히려 했고 어윤중이 내건 최혜국 조관도 종속관계에서는 불필요하다고 빼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교역물품 가운데 홍삼 수출에 동의한 것은 어윤중의 업적 가운데 하나였다. 조미조약에서는 금수품이었지만 여기서 수출품목으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중국인이 애호하는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화 획득의 좋은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어윤중은 통상관계가 수립되면 무역업무가 증대될 것이므로 미리 해관 설립과 관리, 운영할 사람의 인선을 상의하였다. 얼마 뒤 묄렌도르프(Mollendorff, P. G. von)가 고용되어 한국 해관이 설립되었다.
    1차 필담을 마친 다음 북양아문에서 회신이 없자, 4월 13일 어윤중이 서리북양대신 장수성을 찾아가 통상문제를 문의하였다. 이때 장수성이 별도로 예부(禮部)에 자문을 보낼 것을 권하므로 24일 다시 자문을 북경에 보내고 청나라 조정의 결정을 기다렸다.
    조선의 통상 제의 자문이 청나라 조정에 상정되자 관리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엇갈려 심한 논쟁이 일었다. 예부시랑(禮部侍郎) 보정(寶廷)은 조선의 제의가 청나라를 얕보는 것으로 보았다. 물리치면 조선이 청나라의 보호권에서 벗어날 것이고, 받아들이면 청나라와 대등해지므로 신복(臣服)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통상관계가 수립된 후, 통상업무를 총리아문에서 관장하지 말고 종전대로 예부에서 맡게 하며, 통상관계로 내왕하는 사절단은 종래의 사역관(四譯館)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같은 달 29일 조정회의를 거쳐 광서제(光緖帝)의 재가를 받은 사항은 보정의 주장과는 달랐다. 첫째 조선의 무역사무는 총리아문에서 거쳐 처리하게 하고, 둘째 조공(朝貢)·진주(陳奏)에 관한 일은 종전대로 예부를 거쳐 처리하되 견사주경(遣使駐京)주 01)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럴 즈음에 러시아가 육로 통상을 제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어윤중은 5월 2일 통역관 김성손(金性孫)을 해관서로 보내 통상 거부의 자문을 전하였다.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조미통상의 추진도 따지고 보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주복은 “조미조약이 체결된 이상 공법에 따라 제삼국의 통상 제의를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로 수락을 권고하였다. 주복은 조선에의 미국의 진출이 확정된 만큼 러시아 세력을 끌어 들여 세력 균형을 유지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앞서 조선에 건너갔던 초상국(招商局) 파원 5인은 각종의 통상관계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4월 15일 톈진에 돌아왔다. 그러나 조약체결의 실무자인 마젠충(馬建忠)이 조선을 내왕하는 관계로 통상문제를 매듭지을 겨를이 없었다.
    어윤중 또한 조약 체결의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측의 자문을 기다리던 중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결국 어윤중과 김윤식은 청나라 군대의 향도관으로 6월 27일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끝나고 어윤중이 8월 12일 다시 문의관에 임명되어 진주사(陳奏使) 조영하, 부사(副使) 김홍집, 종사관(從事官) 이조연 일행과 함께 톈진으로 가서 중단되었던 통상 논의를 재개하였다.
    어윤중은 장정이 체결될 때까지 10여 일 동안 주복과 더불어 여러 차례의 필담을 거쳐 장정의 초고를 마련하였다. 초고가 이루어지기까지 치외법권(治外法權), 한성개잔[漢城開棧: 한양에 행잔(行棧)을 개설하는 일]·내지채판[內地採辦: 내지로 들어가 토화(土貨)주 02)을 구입하는 행위], 양국 연안에서의 어채, 홍삼 세칙 등 네 개 문제가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어윤중은 초고 내용 가운데 각국의 조약 내용과 다른 곳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주복과 마젠충은 이 장정이 대등한 국가간에 체결된 조약이 아니고 종주국과 속국간의 통상규정임을 들어 호혜·평등의 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어윤중은 치외법권의 규정이 부당하다고 항의했으나, 청나라측은 조선의 법률이 청나라보다 엄하다는 것을 들어 일방적으로 집어넣고 말았다. 다시 어윤중은 일본의 조선 연안에서의 어채활동의 요구를 막기 위해 조선과 청나라의 양국 어민의 어채활동을 조문 속에 규정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청나라측은 해금령의 철폐는 어민의 자유로운 어채활동에 목적이 있는 만큼 이를 조문 속에 명시하지 않으면 어민의 불법 어채가 성행할 것이라고 하여 끝내 삽입할 것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어윤중은 청나라 상인의 내지채판의 금지, 한성개잔을 개항구인 양화진(楊花津)으로 정할 것을 주장해 성공을 거두었다. 끝으로 홍삼 세칙은 원안에는 100분의 30이었지만 어윤중의 끈질긴 주장에 의해 결국 100분의 15로 인하, 결정되었다.
    이와 같이 초고를 둘러싸고 신랄한 논의를 거듭해 수정을 가한 끝에, 8월 23일 청나라측의 직례총독 이홍장·주복·마젠충 등과 조선측의 조영하·김홍집·어윤중 등이 전문 8조의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장정의 첫머리에 “이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 국가간의 일체 균점(均霑)하는 예와는 다르다.”고 하여 불평등 조약임을 밝혔다. ② 상무위원의 파견 및 양국 파원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의 위치를 대등하게 규정한 것(1조), ③ 조선에서의 중국상무위원의 치외법권 인정(2조), ④ 조난 구호 및 평안도·황해도와 산동·봉천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3조), ⑤ 북경과 한성의 양화진에서의 개잔무역을 허락하되 양국 상민의 내지채판을 금하고, 다만 내지채판과 유력(遊歷)주 03)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4조, 관세 3·4조 및 세칙 5조), ⑥ 책문(柵門)·의주, 훈춘(琿春)·회령에서의 개시(5조), 홍삼 무역과 세칙(6조),
    ⑦ 초상국윤선운항 및 중국병선의 조선연해 내왕·정박, 장정의 증감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회(咨會)로 결정한다는 것(7조), 등이다.
    이 장정은 8월 29일 이홍장이 광서제에게 보고하여 9월 12일 재가를 받음으로써 실효를 보게 되었다.
    어윤중은 9월 19일 이홍장을 만나 부속 장정인 육로통상장정과 초상국윤선의 내왕문제를 의논하였다. 전자는 이듬 해(1883) 안으로 국경지방을 답사하고 결정하자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초상국윤선은 조선에 남아 있는 청군의 왕래을 위해 군함이 운항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결정할 필요가 없었다.
    1883년 10월 3일 묄렌도르프와 진수당(陳樹堂) 사이에 「윤선왕래상해조선공도합약장정 輪船往來上海朝鮮公道合約章程」을 체결해 윤선이 운행하였다. 그런데 이 장정이 의결되자 청나라내 강경파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특히 완고파에 속하는 성경장군(盛京將軍) 숭기(崇綺), 봉천부윤(奉天府尹) 송림(松林) 등은 11월 초에 조선의 정세가 불안하므로 군비를 갖추어 대비해야 하고 종속관계를 종전보다 강화해 조선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 대해 ‘자기’를 일컫던 말)과 중국의 지방관이 평행 상대하는 것은 구제(舊制)에 크게 어긋나며, 양국 상인이 상호 왕래하면서 교역하는 구제의 변통을 가져오는 것이므로 중국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일이라 하였다.
    총리아문과 북양대신의 설득으로 무마되었지만, 육로통상장정이 체결되기 전에 숭기·송림 등은 청나라에 유리하도록 무역 왕래의 한계, 개시장의 변경, 어채활동의 제한 등을 미리 설정해 조선측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장정에 삽입하였다.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은 1883년 3월 14일에 청나라의 통화현(通化縣) 지현(知縣) 장석란(張錫鑾)과 「중강무역장정 中江貿易章程」을, 6월 6일에 팽광예(彭光譽)와 「회령통상장정 會寧通商章程」을 체결하였다. 먼저 「중강무역장정」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육로 교역은 조청(朝淸)상인에 한정한다는 것(1조), ② 개시장을 책문에서 중강으로 옮기고 봉천 성내의 여행을 금한다는 것(2조), ③ 압록강 이내 평안도 근방 각처 하구로서 제품관어(祭品官魚)를 잡는 곳에는 어선 왕래 및 민간인의 사포(私捕)를 금한다는 것(3조), ④ 중강·책문 이외의 공도(貢道)주 04)에서 상인의 상행위 금지(11조), ⑤ 양국 교섭시 조선은 청나라를 상국(上國) 또는 천조(天朝)라 부르고, 청나라는 조선을 귀국이라 부른다는 것(2·3조) 등이다. 이밖의 것은 기본 장정에 준한 규정이었다.
    그리고 「회령통상장정」은 봉천성 근처인 역대 왕의 능묘가 있는 곳과 러시아 국경 근처로 여행함을 금한다는 것(2조), 구르카(庫甫喀)·경원간의 호시(互市)주 05)를 폐지한다는 것(3조) 이외는 「중강무역장정」의 내용과 비슷하다.
    이처럼 청나라는 조선과 맺은 「상민수륙무역장정」의 서두에 종속관계를 천명했음은 물론, 치외법권, 개항구 통상, 해상방위의 담당 및 연안 어업 등의 특수 권익을 독점하고 제삼국의 균점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양제국은 청나라와 조선간의 종속관계를 무시하고 청나라의 특수권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먼저, 일본은 1883년 6월 22일에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하고 제42조에서 최혜국 대우를 규정해 청나라의 이익 독점은 사실상 일본에 균점되고 말았다.
    영국과 독일은 같은 해 4월 10일 주일나가사키영사 아스톤(Aston, W. G.)을 시켜 전해에 체결한 양국 조약의 비준을 연말까지 연기할 것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조약의 세칙 문제와 조선정부로부터 받은 조회문[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 한 것] 때문에 본국 의회에서 비준이 거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청국주재영국공사 파크스(Parkes, H.)는 조약 개정차 조선으로 떠났다. 같은 해 10월 27일에 영국과 독일이 조선과 통상장정을 체결했는데 여기서 양국 상인의 조선의 내지채판이 인정되었다.
    이로써, 영국·독일이 청나라에 앞서 조선 내지에서의 상행위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도 부득이 영국·독일의 뒤를 따라 「상민수륙무역장정」의 제4조를 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양대신의 요청에 따라 1884년 2월에 조선 국왕의 동의를 얻어 제4조가 개정되었다.
    이상에서 살펴 보면, 조선과 청나라의 통상관계의 수립은, 오랫동안 쌓여온 왕래제한의 폐단을 버리고 세계정세에 맞추어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자강운동의 일환이었다. 비록 청나라에 대한 종속관계를 끊어버리지는 못했지만, 조선으로는 낙후성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주체적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사신을 파견해 북경에 상주하게 하는 것
    주02
    토산물
    주03
    돌아다니는 일
    주04
    朝貢 사행이 다니는 길
    주05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시장이 열리는 것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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