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붕 ()

함안 무산사 소장 주세붕영정
함안 무산사 소장 주세붕영정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풍기군수, 성균관사성,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경유(景游)
신재(愼齋), 손옹(巽翁)
이칭
남고(南皐), 무릉도인(武陵道人)
시호
문민(文敏)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5년(연산군 1)
사망 연도
1554년(명종 9)
본관
상주(尙州)
출생지
칠원(이설에는 합천)
주요 관직
풍기군수|성균관사성|황해도관찰사
내용 요약

주세붕은 조선전기 풍기군수, 성균관사성,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95년(연산군 1)에 태어나 1554년(명종 9)에 사망했다. 1522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1년 풍기 군수에 임명되어 향교를 관아 근처로 옮겨 복구하였다. 1543년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모방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여 안향을 배향하였다. 1549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해주에 수양서원을 건립하는 등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썼다. 백운동서원은 1550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청원으로 '소수'라는 사액을 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목차
정의
조선전기 풍기군수, 성균관사성,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 · 남고(南皐) · 무릉도인(武陵道人) · 손옹(巽翁).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으나, 아버지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하였다.

증사복시정 주상빈(周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장손(周長孫)이고, 아버지는 주문보(周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주1주2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생애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주3에 뽑히고, 홍문관정자 · 수찬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 · 병조좌랑 · 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주4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家禮)』에 따랐다. 승문원교리 · 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주5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주6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 · 전한 · 직제학 · 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주박(周博)을 양자로 삼았다.

활동사항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 · 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주7 이후 폐지되었던 주8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주9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해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 풍기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한 안향의 11대 손인 안현(安玹)의 노력으로 백운동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주10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 기구로 변모해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청백리주11에 뽑히었고, 「도동곡(道東曲)」 · 「육현가(六賢歌)」 · 「엄연곡(儼然曲)」 · 「태평곡(太平曲)」주12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 『죽계지(竹溪誌)』 · 『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 · 『진헌심도(進獻心圖)』가 있다.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했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
『명종실록』
『국조방목』
『국조인물고』
『무릉잡고(武陵雜稿)』
『국조인물지』
『연려실기술』
『해동잡록(海東雜錄)』
『소수서원등록』(조선사편수회, 1940)
「朝鮮における書院の成立」(柳洪烈, 『靑丘學叢』 29·30, 1937·1939)
「백운동서원의 설립과 풍기사림」(윤희면, 『진단학보』 49, 1980)
주석
주1

벼슬, 명성,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    우리말샘

주2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종이품 벼슬아치의 부친, 조부, 증조부나 충신, 효자 및 학행(學行)이 높은 사람에게 내려 주었다.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 세종 8년(1426)에 시작하여 세조 때 없앴다가 성종 24년(1493)에 다시 실시하였다.    우리말샘

주4

법에 의거하지 않고 함부로 형벌을 가함. 또는 그 형벌.    우리말샘

주5

조선 중종 38년(1543)에 주세붕이 경상북도 영주시의 백운동에 세운 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뒤에 소수 서원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6

기관의 중앙 부서에 있는 직책.    우리말샘

주7

조선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사화.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 김정 등의 신진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우리말샘

주8

중국 송나라 때에, 여대균의 향리인 산시성의 란톈(藍田)에서 실시한 향촌 자치 규약.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따위를 강령으로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실시된 향약의 모체가 되었다.    우리말샘

주9

조선 시대에, 서원이 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스스로 마련하여 소유하던 토지. 면세전은 아니었고 소유 상한은 3결이었다.    우리말샘

주10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 사액한 것이 시초이다.    우리말샘

주11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    우리말샘

주12

장편으로 된 노래. 또는 곡조가 긴 노래.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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