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천(仁川). 호는 다의당(多義堂). 달성 출신. 아버지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채원길(蔡元吉)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상장군 고천서(高天瑞)의 딸이다.
효성이 출천(出天)하였으며, 문학에 심취하여 영양(永陽)의 정몽주(鄭夢周)와 경전(經傳)을 강습(講習)하고 도의(道義)를 논변하였다.
일찍이 문과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고 정몽주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되자, 동지들과 함께 부조현(不朝峴)에 관복을 걸어놓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두문동72현(賢)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다음 해 평산(平山)의 다의현(多義峴)에 옮겨 집을 ‘다의당’이라 이름하고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세상에서는 두문동 72현을 백이숙제(伯夷叔齊)에 비하여 그들의 충절을 찬양하였다.
1740년(영조 16) 영조는 개성에 나가서 그들의 충의를 가상하게 여겨 고려충신부조현(高麗忠臣不朝峴)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시호는 정의(貞義)이다. 저서로는 『다의당실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