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사고(忠州史庫)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었던 고려 말·조선 전기의 서고(書庫)이다. 고려 말기 왜구의 침탈이 거세짐에 따라 해인사 등지에 설치되었던 외사고가 중부 내륙의 충주로 이관하여 안착하게 되었다. 충주사고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 충주 개천사에서 충주 객사 동남쪽으로 이설된 외에는 큰 변화 없이 외사고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439년 전주·성주사고가 신설될 때까지 유일한 외사고로 기능하였다. 충주사고에는 고려 이래의 귀중한 서책들을 많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이후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다.
충주사고(忠州史庫)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설치되었던 고려 말 · 조선 전기의 서고(書庫)이다. 충주사고가 고려시대에 처음 설치된 것은 왜구의 침입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1379년(우왕 5) 9월 왜구가 단계(丹溪) · 거창 · 합천 등지까지 침입해 오자 해인사(海印寺)의 역대 실록을 선산의 득익사(得益寺)로 옮겼다.
1381년 7월 왜구들이 안동 지방까지 침입하려 하자 사관(史官)을 파견하여 예천 지방인 보주(甫州) 보문사(普門寺) 소장의 사적(史籍)들을 충주의 개천사로 이장(移藏)하였다. 그러므로 선산 득익사의 실록은 우왕 5년과 7년 사이에 또 한번의 이동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다가 1383년 6월 왜구가 내륙까지 침입해 오자 충주 개천사의 실록이 죽주(竹州)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겨졌고, 왜구가 서해안으로 침입해 오므로 다시 개천사로 옮겨졌다.
고려 시기의 병화는 대부분 북방 민족의 침입에 의한 것이었으며, 왜구로 인한 피해는 이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미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려 시기의 외사고는 주로 한반도 남쪽의 내륙 혹은 도서 지방의 사찰로 이설되어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국내외의 정세가 변하고 왜구가 기승을 부려 해안가 마을을 침탈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였으므로 외사고가 중부 내륙의 충주로 이관하여 안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충주사고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외사고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439년(세종 21) 7월 전주 · 성주 등에 외사고가 확충될 때까지 조선 초기의 유일한 외사고로 기능하였다. 다만, 조선의 건국과 함께 충주의 객사 동남쪽에 실록각(實錄閣)을 지어 개천사의 사적들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써 그 입지에 변화가 생겼다. 이는 외적의 접근이 어려운 오지의 사찰에 외사고를 설치한다는 고려 시기의 사고 입지 선정 원칙에 변화가 발생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조선 초기 사고 입지 선정에 있어 사적의 이용 및 관리의 효율성이 이전 시기보다 강조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국가의 중요한 사적을 불교 사찰에 보관할 수 없다는 억불적인 인식 또한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충주사고가 설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4년(태종 4) 오선경(吳先敬)을 포쇄별감(曝曬別監)으로 파견하였으며, 1412년 송악(宋樂)을 참고하기 위해 충주사고 형지안(忠州史庫形止案)을 바치도록 한 점으로 보아 조선 건국 직후나 1404년 이전에 충주사고가 설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충주사고의 초기 관리 사항은 『세종실록』 지리지 충주목조(忠州牧條)에 의하면 사고를 수호하던 수호관(守護官) 5인과 별색호장(別色戶長) · 기관(記官) · 고직(庫直) 각 1인이 있었다. 조선시대 충주사고는 고려시대 외사고의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다른 외사고들보다 사고 개폐(開閉)에 관한 형지안이나 중요 서적들을 많이 소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소장했던 서적의 종류나 규모를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1412년 8월 기사에 사관 김상직(金尙直)을 파견해 충주사고에 소장된 서책들을 가져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진상된 서적류들을 보면 의학 · 음악 · 자전(字典) · 역사서 · 지리서 · 풍수서 · 고려 역대 실록이었다. 태종은 이 책들을 검토한 뒤 『신비집(神祕集)』 같은 비기(祕記)는 유사눌(柳思訥)을 시켜 태워 버리고 나머지 서적들은 춘추관에 소장하게 하였다. 그 뒤 1421년에도 세종은 충주사고에 전해 오는 책이 많음을 알고 봉교 정주생(鄭周生)을 파견해 서적들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단지 세종이 충주사고 서적부(書籍簿)를 친히 열람하고 볼 만한 서적들을 가려 뽑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세종 연간까지도 충주사고는 고려시대부터 전해 온 귀중한 서책들을 많이 보관하여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불타 버린 이후에는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다. 이는 전란 이후 외사고 입지 선정에 있어 사적의 이용과 관리의 효율성을 중요시하였던 입장이 사적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다시 한번 전환됨에 따라 외사고가 모두 산간의 오지로 옮겨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