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太祖)의 개념은 고대 중국의 조상 인식에서 기원하였다. 고대 중국의 부족들은 자신들의 첫 조상을 시조(始祖) 혹은 태조(太祖), 대조(大祖)라 불렀다. 『 예기(禮記)』를 비롯한 문헌에서는 천자는 물론 제후, 대부 등의 첫 조상을 ‘태조’라 언급하였다.
첫 조상의 의미로 광범위하게 통용되었던 태조는 군국묘(郡國廟) 제도가 시행되었던 전한(前漢) 이후부터 군주의 전유물로 한정되었다. 창업지주(創業之主)에게 언제부터 태조의 묘호(廟號)를 추증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다만, 삼국시대부터 태조의 묘호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확인 가능하다.
『 삼국사기(三國史記)』나 『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왕력(王曆)에는 묘호가 따로 붙지 않고 왕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부터 묘호를 사용했던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는 무열왕(武烈王)에게 태종(太宗)의 묘호를 올려 당나라와 마찰을 빚었다. 이는 태조라는 묘호를 의식했기 때문에 태종의 묘호를 붙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에는 태조의 업을 계승했다는 표현을 통해 나름의 시조관(始祖觀)이 성립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소지(炤知) · 지증(智證) 마립간(麻立干) 시대에 박혁거세의 시조묘와는 별도로 신궁(神宮)이라는 김씨시조묘가 건립되었다.
결국 김씨 왕조는 세습왕권을 한층 더 과시하기 위해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을 새로운 나라의 묘주로 정하고, 격을 높여 태조로 추숭(追崇)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고구려와 백제는 동명왕을 시조라 하며 묘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따로 태조를 추봉해 묘호를 올린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는 많은 업적을 세웠던 제6대 궁(宮)을 태조왕이라 했고, 백제는 일본 측 기록에 백제왕실의 후예인 인정(仁貞)이 백제의 태조를 도모왕(都慕王)이라 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따라서 태조의 묘호는 삼국시대부터 창업지주를 추존한 것이었고, 관련 전통이 고려 · 조선 시대로 계승되었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중국과 동일한 묘호를 사용하였다. 창업지주를 태조, 수성지군(守成之君)을 종(宗)으로 명명했던 것은 왕조의 자존의식과 권위를 드러낸 것이었다. 조선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던 시책문(諡冊文)을 통해 난의 평정, 하늘에 응해 새로운 기업을 세웠던 일, 국호를 새롭게 했던 일 등을 근거로 건국 시조에게 태조의 묘호를 붙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건국 시조로서 한양을 조선의 새로운 수도로 정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곳을 마련해 준 것은 물론 호생(好生)의 마음으로 국가의 무궁한 운을 열었다는 점도 강조하면서 태조의 묘효를 올린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시책문의 논리 중 일부는 이미 권근(權近)이 이성계를 태상왕(太上王)으로 추숭하는 옥책문(玉冊文)에서 제시된 내용이었다. 옥책문에서는 이성계가 천년에 한 번 오는 운에 응해 백성들의 추대에 따라 새로운 왕업을 열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두 글을 통해 조선의 건국 시조에 대한 묘호가 태조로 결정되었던 논리를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