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曉峰, 1888~1966)은 평안남도 양덕 출신으로 본관은 수안(遂安)이며, 속명(俗名)은 이찬형(李燦亨)이다. 그의 아버지는 병억(炳億)고, 어머니는 김 씨(金氏)이며,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법호(法號)는 운봉(雲峰) · 효봉(曉峰)이며, 법명(法名)은 원명(元明) · 학눌(學訥)이다.
효봉은 12세까지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웠으며, 14세 때 평양감사가 베푼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를 할 만큼 뛰어났다. 18세에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26세에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귀국한 효봉은 1913년부터 1923년까지 서울 지방법원, 함흥 지방법원, 평양 복심법원 등에서 법관으로 생활하였다. 그는 판사로 지내며 독립운동을 한 동포를 심판해야 한다는 시대적 모순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1923년 어쩔 수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리게 된 그는 이후 일제가 임명한 판사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엿장수 행색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그는 1925년 38세의 나이로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의 석두 화상(石頭和尙)에게 출가하여, 원명이란 법명과 운봉이란 법호를 받았다. 1932년 사월 초파일에 는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을 계사(戒師)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1933년 여여원(如如院)과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수행을 하였으며, 이어서 전국의 적멸보궁을 찾아 한 철씩 정진하였다. 1936년에는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1937년 그는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 조실(祖室)로 있으면서 1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이때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게 된다. 송광사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의 정혜결사(定慧結社) 도량이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보조국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과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선풍(禪風)을 재현하고자 하는 원(願)을 세우게 된다. 1938년 그는 법명을 원명에서 학눌로, 법호를 운봉에서 효봉으로 바꾸었다. 학눌은 보조 지눌을 배운다는 의미이고, 효봉은 송광사 제16세 국사인 고봉 화상(高峰和尙, 1350~1428)을 잇는다는 의미이다.
1946년 효봉은 해인사 가야총림(伽倻叢林)의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 동안 해인사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950년 효봉은 부산 동래에 있는 금정선원(金井禪院)으로 자리를 옮겼고, 1951년부터 1954년까지는 통영 용화사 도솔암(兜率庵)에서 머물렀다. 1954년 통영 미륵산 너머에 미래사(彌來寺)를 창건하여 그곳에 머물던 중,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이 일어났다. 그러자 효봉은 서울로 올라와 선학원(禪學院)에 머물며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56년 효봉은 동산(東山) · 청담(靑潭) 등과 함께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다녀온 직후, 조계종의 의결 기구인 종회(宗會)의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1957년 종무원장에 이어, 1958년 조계종 종정(宗正)이 되었으며, 1962년 통합 종단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 뒤 효봉은 통영 미래사에 머물렀으나 건강이 나빠지자 치료를 위해 동화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곳에서도 수행승들을 지도하였다.
1966년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겨 머무르던 효봉은 10월 15일 오전,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효봉의 영결식은 1966년 10월 21일 서울 조계사에서 조계종단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사리와 정골은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지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효봉은 보조 지눌을 계승하여 정혜쌍수의 선풍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정혜쌍수라 말할 때의 정(定)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본체를 가리키며, 혜(慧)는 일체를 환히 비추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효봉은 이러한 마음을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라고도 표현하였는데, 그는 마음의 본체와 작용을 분리할 수 없듯이 정과 혜도 항상 함께 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효봉은 계학(戒學) · 정학(定學) · 혜학(慧學) 삼학(三學)을 가리켜 계율은 집터와 같고, 선정은 재목과 같으며, 지혜는 집을 짓는 기술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아무리 기술이 있더라도 재목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또 재목이 있더라도 터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삼학 중 어느 것도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효봉은 이 삼학을 쉬지 않고 함께 닦으면 마침내 정각(正覺)을 이루게 된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