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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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향안 및 관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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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문헌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를 운영하던 향중사류들을 수록한 향약서. 향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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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향안은 조선 시대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를 운영하던 향중사류들을 수록한 향약서이다. 향안의 체재는 관직·성명·본관·자·호·생년간지와 누구의 아들 등의 순서이다. 입록 자격은 친족·처족·외족의 족계가 분명해야 되고 지방에 사는 문벌세족이어야 한다. 또 가계와 본인 모두 허물이 없어야 되고 품행이 뛰어나야 한다. 입록은 향원이 추천을 하면 토의를 거쳐서 진행된다. 향안에 들어야 양반으로서의 대우는 물론 좌수·별감에도 선출되고 지배 신분으로 행세한다. 현재 알려진 향안은 경상도 12개, 충청도 2개, 전라도·함경도 각 1개 등이 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를 운영하던 향중사류들을 수록한 향약서. 향신록.
내용

일종의 향신록(鄕紳錄)으로 향좌목(鄕座目) · 향적(鄕籍) · 향록유안(鄕錄儒案) · 향목(鄕目) · 청금록(靑衿錄) 또는 사적(士籍)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대개 세족(世族) · 현족(顯族) · 우족(右族) 등으로 불리는 재지사족(在地士族)들만이 입록될 수 있다. 또한, 향안에 입록되어야 비로소 양반으로서의 대우는 물론, 좌수(座首) · 별감(別監)향임에도 선출되고, 지배신분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향권을 장악한 재지사족들로서 대개 고려첨설직을 받은 전함품관(前銜品官)이나 또는 조선개국시 처음부터 훈신(勳臣) 계열에 들지 않고 조상 전래의 세거지에 토착해 경제적 · 문벌적으로 강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앙권력에 대립해온 부류들이었다.

향안의 체재는 대체로 관직 · 성명 · 본관 · · · 생년간지와 누구의 아들이나 아우 또는 손자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름만 기록해놓은 것도 있다. 입록 자격으로서 친족은 물론, 처족과 외족까지 포함된 족계가 분명해야 되고, 반드시 문벌세족이어야 하였다.

그리고 가계는 물론, 본인에게도 아무런 허물이 없어야 되고 품행이 뛰어나야 하였다. 허물이란 본인 및 내외족계 안에 천계(賤系) 또는 범죄 흔적을 말한다.

입록 절차는 향원(鄕員)들이 추천을 하면 충분한 토의를 거친 다음 권점(圈點)을 통해 가부를 결정하였다. 지역에 따라 만장일치의 순가(純可)에서부터 1 · 2 · 3부(否)의 네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권점을 거치는 것은 아니고 향인이 모두 존경하는 사족은 바로 입록되는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허물이 있는 자를 사정(私情)에 얽매여 잘못 추천했을 경우 추천인도 함께 처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부권점의 과정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는 자료가 밀양의 『향헌(鄕憲)』이다.

추천 시기는 대개 춘추의 강신일(講信日)에 행했고, 나이는 25∼30세 이상이라야 하였다. 이때 입록되는 사람은 대개 입록례(入錄禮)를 치른 후 비로소 좌목(座目)에 기록된다.

이러한 향안이 작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대체로 유향소 성립시기와 같이한다고 보며, 자료상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풍패향좌목(豊沛鄕座目)』이다. 이른바 『향헌』에 실려 있는 이 좌목은 태조 출생지인 풍패현(豊沛縣)의 향안이다.

여기에 실린 인물은 이 지방출신자만이 아니라, 개국공신, 이 지방과 연관성이 있는 자, 세종 때 중신, 세조공신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재지사족들의 향권장악이라는 사실과 관계 없이, 다만 태조 출생지에 대한 존엄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향안이 재지사족들의 권익옹호와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은 지방통제책이 강화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향안은 임진왜란 때 거의 타버려 현존하는 것은 전부 난 이후 재작성된 것들이다. 이것은 난중에 향안의 소실로 향촌사회의 질서가 크게 무너지자 새로운 질서회복의 요청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 구안(舊案)을 수정하면서 인물의 첨삭이 가해졌고, 그 뒤 극심한 신분상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추록(追錄)의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또한, 당쟁과 서얼허통(庶孽許通)의 영향도 향안의 성격변화에 크게 작용하였다. 즉, 한번 향안에 오르면 자자손손 양반 행세를 할 수 있고, 특히 서북지방의 경우는 군역까지 면제받았기 때문에 입록을 둘러싸고 향인간에 쟁투가 심하였다. 심지어는 향임을 매매하는 폐단까지 발생해 영조 · 정조 이후 향안 수정이 수령들의 합법적인 수탈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향전(鄕戰)은 향외인(鄕外人 : 신향)과 향원간, 또는 향원상호간의 문벌싸움이 대부분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입록에 불만을 품고 향안을 세파(洗破)해버린 순천의 경우, 향안 수정에 불만을 품고 이에 참여한 인물을 죽인 함흥사건, 향안을 태워버린 인동(仁同)의 경우, 무식무치(無識無恥)한 무리가 향적을 가문을 일으키려는 도구로 삼아 싸움이 치열한 끝에 마침내 향적이 재분(再焚)된 남원의 경우 등은, 당시의 사회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까지 학계에 알려져 있는 향안은 경상도 12개, 충청도 2개, 전라도 1개, 함경도 1개 등 도합 16개 정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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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회사연구사료총서』(김인걸·한상권 공편, 보경문화사, 1986)
「조선후기 향안(鄕案)의 성격변화와 재지사족」(김인걸,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3)
「향안(鄕案)연구」(신정희, 『대구사학』 26, 1984)
「조선시대 향안(鄕案)에 대한 일고찰」(김호일, 『한국사학』 9, 1987)
「17세기 후반 남원향안(南原鄕案)의 작성과 파치(罷置)」(김현영, 『한국사론』 21, 1991)
「1530년 안동지방의 향안(鄕案) ≪가정경인(嘉正庚寅)좌목(座目)≫의 분석」(김현영, 『택와허선도교수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擇窩許善道敎授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1992)
「17·18세기의 제주향촌사회구조와 그 성격-제주향안과 천기(薦記)를 중심으로-」(강창룡, 『제주도연구』 8, 1992)
「鄕案について」(田川孝三, 『山本博士還曆紀念東洋史論叢』,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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