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할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강군보(姜君寶)이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강시(姜蓍)의 아들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 · 부사 · 첨서사사(簽書司事)를 역임하였다. 1385년에는 밀직부사로서 명나라에 갔다온 김유(金庾)를 찬성사(贊成事) 우현보(禹玄寶)와 함께 국문하였다. 혐의는 김유가 명나라에서 우왕의 혈통 문제를 발설했다는 것이다. 이후 12월 명나라에 갔다.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지밀직(知密直)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에 조준(趙浚) 등과 함께 세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린 것을 이유로 사퇴하였고,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 · 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이 때 정몽주(鄭夢周)의 사주를 받은 간관 김진양(金震陽) 등이 조준 · 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 대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는데, 1392년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처음에는 막내아우인 강회계(姜淮季)가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탄핵을 면하였으나, 곧 진양(晉陽)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저서로는 『통정집(通亭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