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본존 6.85m, 우협시보살 4.62m, 좌협시보살 4.55m. 돌출된 암면에 거대한 본존을 조각하고, 좌우의 협시보살은 별도로 원각(圓刻)하여 배치하였다.
본존은 암벽의 파손 때문에 머리와 신체 각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는데, 특히 얼굴의 손상이 심하여 눈 이상의 얼굴과 머리는 모두 탈락해 버렸다. 코는 큼직하며 입은 꽉 다물었고, 턱은 날카로워 박력 있는 윤곽과 함께 힘이 충만한데, 고졸한 미소가 남아 있다.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가 잘 나타나지 않았으며, 목에서 내려온 어깨선은 둥글어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1979년 지정)과 비슷하지만, 어깨를 움츠린 것은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1962년 지정)의 본존과 유사하다.
신체는 양감이 거의 없이 그냥 원통형으로 되었으며, 이것은 장대한 체구,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의 수인과 함께 부처의 위엄과 힘을 나타내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가슴 부근에서 탈락이 심하여 확실한 옷자락 무늬는 알 수 없지만, U자형의 옷주름이 가슴 부근부터 성글게 표현되었다.
협시보살은 몇 개의 조각으로 파괴되어 아래 계곡에 굴러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왼쪽 협시보살은 대좌까지 모두 4개로 분리되어 있던 것으로, 머리 부분은 목까지 남아 있는데,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化佛)이 조각된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갸름하며 윤곽선이 부드럽고 적당히 살이 쪄서 복스럽고 우아한 얼굴이다. 눈은 가늘고, 코는 큼직하고 시원스러우며, 입술은 살짝 다물었는데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본존불에 비하여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운 편으로, 상체는 굴곡도 잘 나타나 있다. 왼손은 내려 정병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데, 이 인상(印相)과 보관의 화불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양팔에는 천의(天衣)가 휘감겨 있으며, 여기서 내려온 3단의 옷주름이 다리 상단과 하단에 각각 걸치고 있어,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의 관음상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졌다.
대좌는 원통형의 돌을 앞부분만 파서 여기에 몸의 무릎 이상까지 낄 수 있도록 한 특수한 것으로서, 표면에는 옷자락 무늬를 표현하고, 발 아래는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 겹꽃잎의 연꽃무늬)을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으로 조각하였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5개의 조각으로 절단된 것으로서, 현재는 왼쪽 팔이 떨어져나갔다. 왼쪽 보살보다 훨씬 파괴가 심하나, 전체 높이는 비슷하다. 얼굴은 왼쪽 보살과 비슷하지만, 직사각형에 가까운 데다 눈도 바로 뜨는 등 보다 남성적인 기풍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코끝이 다소 마멸되었다. 신체도 왼쪽 보살과 거의 같으며 목걸이·옷주름도 비슷한데, 관음보살인 왼쪽 보살에 대하여 대세지보살로 추정된다.
이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7세기 후반∼8세기 초)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형태면에서는 기념비적인 양감을 느낄 수가 있는데, 원통형의 체구라든가 어깨가 좀 움츠러든 것 등은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의 본존과 흡사하며, 또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1980년 지정)의 본존과도 비슷하다.
선의 표현에서 본존의 각선(刻線)은 명확하고 힘 있게 표현되었으며, 법의의 U자형 옷주름 선은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의 옷자락처럼 장중하고 묵직하게 처리되었다. 그 밖에 보살의 천의 주름은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보살상의 천의와 비슷한, 부드러우면서도 생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마애석불상은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과 친연성을 가지면서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의 불상 수법이 나타나고,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과도 작풍을 같이하는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이라고 추정된다.